마태복음 7장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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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3-24 12:53 조회3,14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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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장 강해
제목: 천국 건설
요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절)
5-7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으로서 7장에서도 천국 시민으로서의 지켜 순종해야 하는 새 계명을 예수께서 말씀하여 주신다. 1-5절은 자기를 비판하라, 6절은 거룩하고 진실하라, 7-12절은 믿음으로 구하고 소원성취 하는 사람, 13-14절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15-20절은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21-23절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 24-27절은 천국 건설, 28-29절은 예수님 설교에 대한 제자들의 응답을 말씀한다.
자기를 비판하라 7:1-5
1-2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비판하는 것은 형제에 대하여 정죄하거나 심판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형제에 대하여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바로 자기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사람을 판단하는 자는 사람에게 판단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게 된다. 비판하는 사건마다 심판이 따르면서 하나님의 최종 심판도 따르게 된다.
그러면 무슨 일이든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거룩하므로 진실에 이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볼 때에 마치 하나님의 심판 위치에서 형제를 정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긍휼히 여기고 위하여 기도하며 따라가거나 협력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아 보고 자신을 더 깨끗이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은 죄인이고 자기는 의인인 것처럼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월권이면서 자기의 교만함을 나타내는 결과가 된다(롬 2:3).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고 희생함으로 봉사할지라도 범죄에는 경계해야 한다.
사랑과 긍휼이 없는 자에게는 사랑과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마 18:21-35). 우리가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똑같이 입었다(롬 3:22). 무한한 사죄와 칭의와 화친과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으로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은혜를 깨달아 감사하고 우리도 형제에 대하여 사랑하고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형제도 나와 같이 사죄하여 주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형제를 비판하면 비판을 받게 되고, 헤아리는 것으로 우리도 헤아림을 받게 된다. 형제에 대한 사랑과 긍휼은 곧 자기에게 대한 사랑과 긍휼이다.
거룩함과 화평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한다(히 12:14). 거룩하고 진실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함으로 화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거룩함으로 구별하여도 사랑함으로 화평을 이루지 못하여도 안 되고, 사랑함으로 화평하여도 거룩과 진실이 없어도 안 된다. 거룩하고 진실하면 사랑함으로 화평을 누리게 되고, 우리가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화평을 누리면 그 속에 거룩과 진실이 있어야 한다. 비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으로 구별하고 자기에게 대해서 진실하지 못하고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자기가 판단을 받게 된다.
3-5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하여도 진실하지 못한 자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아도 자기의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중심의 사람이다. 티는 작은 죄악이지만 들보는 티보다 더 큰 죄악을 비유한다. 이러한 죄는 남을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흔히 범한 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깨닫지 못하고 율법으로 사람들을 정죄하였다. 그들은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범죄하고 타락한 사람은 중생하여 믿는 사람이라도 옛 사람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믿지 아니 하는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게 된다. 이것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별은 하여도 그것을 자기의 복음으로 받지 못한다. 복음으로 받는 사람은 자기가 아는 대로 자기의 죄를 찾아 회개함으로 진실하고 겸손한 자가 되고, 그래도 자기에게 막혀 있는 죄악을 형제에게서 작은 죄악이라도 자기 속에 더 큰 죄악을 발견함으로 회개를 한다. 이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자기보다 더 낫게 여기고 작은 죄를 용서한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사죄하여 주었는데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못할 죄악이 있겠는가? 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므로 자기의 죄악을 찾아 회개함으로 성령의 감동하시는 진리를 깨달아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뽑는 일은 주님이 성령으로 역사하여 주신다. 자기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뽑으려고 하면 뽑지도 못하고 다시 비판과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지체이므로 한 형제들이다.
자기의 죄악을 회개하지 않으면서 형제의 죄악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외식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별하는 거룩은 가져도 진실은 없기 때문에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게 된다. 진실하지 못하면 서로 사랑함으로 화평함도 이루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 거룩함으로 진실함에 이르고 희생함으로 화평함을 가진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단일교회가 되지 못하면 영생하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거룩하고 진실하라 7:6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정상의 사람이라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줄 수 없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질 수 없다. 그것을 던지면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발로 밟을 뿐 아니라 도리어 상하게 한다는 말씀이다. 거룩한 것은 성결한 하나님의 복음을 말씀한다. 진주도 영원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복음을 비유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 완전하며 불변하고 거짓이 없는 진리이다(마 13:44,45).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복음으로 받으면 자체와 행위는 거룩하게 되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진주라고 한 것은 복음으로 받으면 자기는 하나님 형상대로의 사람으로 존귀하여 지고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영광스럽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받으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자가 되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자가 된다. 개와 돼지는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다. 사람이 범죄하고 타락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사람이라도 본질과 본성을 상실함으로 수성화(獸性化)된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복음을 훼방하는 “개”와 “돼지” 같은 자들이었다. 개와 돼지는 거룩한 것과 귀한 보석을 구별하지 못한다. 거룩하고 진실함이 없으며 외식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깨닫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한다. 그들은 그것을 도리어 해한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잡아서 죽이기까지 하여 복음을 핍박하였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예언이다. 거룩하고 보배로운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고 진실한 자들에게 길이 되고 생명이 되는 복음이다(계 3:7, 8).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이며 지식이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거룩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영광스럽고 존귀하게 된다. 거룩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은 죄와 의, 참과 거짓, 선과 악, 복과 저주 둘로 구별하여 거짓을 버리고 참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선하고 의로우며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주권능력을 힘입고 존귀하게 된다. 대속하신 주 하나님은 성령과 말씀으로 감동하시고 가르쳐 거룩하고 진실하게 신앙생활 하게 하신다. 이 거룩과 진실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가는 열쇠이다. 거룩은 가지고 자기에게 진실을 가지지 않고, 형제에게 악하다, 거짓되다, 죄가 된다 등으로 정죄하고 심판하면 자신이 하나님 위치에서 교만하게 되고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게 된다.
우리는 거룩과 진실을 가져야 한다. 거룩과 진실을 가진 성도는 선하신 주님을 모시고 주님 시키시는 대로 순종해서 의에 이르고 주님 사랑 안에 거하여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구하는 것을 얻고 찾으며 문이 열리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형상대로의 사람이 되어 현실만 상대하여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거룩하고 진실하므로 주님을 먼저 우리 안에 모시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면 주님이 다 시행하여 주신다. 하나님 형상대로의 사람으로 행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믿음으로 구하고 소원성취 하는 사람 7:7-12
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형상대로 사람으로 사는 자이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주권통치에 완전 복종하는 자이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간구하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보고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딤전 4:5; 벧전 1:22, 23; 요일 3:3). 심령의 눈이 밝아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고 간구하는 기도를 할 수 있다(롬 12:2).
하나님의 아들들은 금생과 내세에 있어서 구원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이 많다. 이런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구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이 모든 것이 주권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지극히 크시고 무한하시며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소망하는 것을 구하라고 하신다(약 1:5-8).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시려고 명령하고 계약하며 현실로 인도하신다. 내게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것이고, 또 하나님의 것을 받아야 우리는 그것으로 구원을 이루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지혜, 소유, 능력, 사랑, 지식, 권세 등을 받지 않으면 없다. 우리는 영과 육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소망하고 믿음으로 구하면 받게 된다. 소망과 믿음으로 간구하는 기도와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편이다. 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아니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약 4:1-3).
우리에게 궁핍한 것은 근검절약 하지 아니함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구하지 아니해서 궁핍하다.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다(약 4:2-3).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한다(마 6:33).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루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꾸짖지 아니 하시고 반드시 더하여 주신다(약 1:5).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주실 때까지 구해야 한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에게 이 모든 것이 홀로 하나님에게 주권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간구하는 기도를 하다가 응답이 없다고 쉽게 낙심한다. 기도를 계속하지 못하고 중단한다. 그것은 이전에 구함으로 받은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멸망하게 된 것이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홍해를 건너게 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잊어버린 까닭이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으로 역사하여 주신 은혜를 잊어버렸으면 다시 찾아서 우리의 소망과 믿음을 더욱 더 견고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찾는 자마다 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 능력을 찾아 깨닫고 믿게 되는 것이다. 찾는 것은 잊어버린 것을 찾는 경우도 있지만 기도하여 구한 대로 그 실상을 얻으려고 그 방편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서 찾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다(롬 12:2). 하나님의 받은 은혜를 깨달아 알고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믿음으로 간구하여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찾지 못하면 그 뜻대로 행하지 못한다. 왜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는가? 그것은 닫혀있는 문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비밀이다.
그러므로 그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려야 한다(계 3:20). 그 문은 심령의 문이다. 자기의 죄로 가루어져 있는 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형제의 눈에 티가 보이면 자기의 눈에 들보를 발견하고 그 들보를 제거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자기를 거룩하게 해야 한다(딤전 4:5). 주님은 문을 두드리면 열어주신다. 우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가야 한다(사 26:2). 주님은 심령의 눈을 밝게 하여 주시고, 우리는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고 새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주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가 믿고 순종하면 구하는 것이 실상 된다. 우리에게 해되는 것을 제하고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하고, 그 방편을 모르면 그것을 찾아야 하고, 그것을 찾아 만나면 알게 되고 잊어버린 것을 찾으면 가지게 된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찾아서 의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두드리면 열어주신다.
다만 구하지 아니하면 얻지 못하고, 찾지 않으면 만나지 못하고, 문을 두드리지 아니하면 열고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가 아무리 구하여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믿음에 거하지 못하고, 문을 두드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여 주시는 것을 받지 못한다. 응답하시는 주님은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성도가 삼중으로 간구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또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하여 주시는 것을 말씀하신다. 세 가지로 구하고 노력하면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은 반드시 성취하여 주신다. 필요와 가치를 따라서 구하면 얻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찾으면 찾게 되고, 나아가는 길이 막힌 문을 두드리면 문을 열어주시고 그 길을 가게 하신다. 이 세 가지 성도의 간구와 노력으로 성도의 소원은 성취된다.
9-11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아들이 부모에게 떡을 달라고 구하면 돌을 주거나, 생선을 달라고 하면 뱀을 주는 부모는 아무도 없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해롭거나 필요가 없는 것을 주지 않고 필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준다. 성도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주의 이름으로 간구할 때에 보배롭고 필요한 것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틀림없이 얻고 만나고 열어주시는 것을 확신하게 하는 말씀이다. 구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구하라는 것이고, 그것을 주실 때는 성령과 말씀 곧 영감과 진리로 주신다. 그 영감과 진리대로 믿고 순종하면 그 실상이 된다. 그러므로 성도가 기도할 때에 믿음으로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한다(막 11:24).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는 말씀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반드시 주신다는 말씀이다. 인간은 선하게 지음을 받았으나 타락한 이후에 원죄와 본죄로 악하게 되었다(시 14:1-3; 53:1-3; 전 7:20; 롬 7:19-21). 악령, 악성, 악습으로 악한 자이지만 자기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반면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선하며 의롭고 완전하시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들이 간구할 때에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좋은 것이 무엇보다 성령이시다(눅 11:13).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또 그들은 기다렸다(욜 2:28-29). 성령이 임하시면 모든 좋은 것이 완성되고 영원 완전한 것이 건설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으로 구하고, 믿음으로 찾고, 믿음으로 문을 두드리는 자마다 반드시 받게 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주권을 돌리는 것이며, 우리의 소망과 믿음을 하나님께 두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아 영생하게 하려 함이다. 하나님에게 받지 아니하면 불쌍하고 가련한 것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성령과 말씀으로 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 믿음으로 순종하면 우리에게 필요하고 좋은 것이 된다. 인간의 간구와 노력에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전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시면 우리의 소원이 성취된다. 이 두 가지를 믿는 믿음이 없으면 소원은 성취되지 못한다.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능력이 합하여 성취되는 것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 역사에 인간의 믿고 순종하는 행위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소원성취이다. 이러한 소원이 성취되는 데는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받은 것을 심어야 할 씨와 먹어야 할 양식을 구별해야 한다. 씨와 양식을 구별하지 않고 다 양식으로 먹으면 심을 씨가 없기 때문에 다음에 추수할 것이 없다. 그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에게 받은 것을 우리는 먼저 씨와 양식을 구별하고, 그 다음에 씨는 심고 양식은 먹어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영적 물적 은혜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우리도 남에게 대접을 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고 선지자가 해야 하는 일이다. 남에게 대접은 받으려 하고, 남에게 대접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구하는 것을 주실 수 없다는 말씀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그것이 자기에게 있어서 남에게 먼저 대접하는 하나님의 법이 자기에게 있고 그것을 알게 하는 선지자가 자기 속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씨와 양식을 구별하는 사람이 되어야 구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받을 수 있다. 받은 것을 정욕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사람은 배나 악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주실 수 없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므로 주신 은혜를 깨달아 감사하고, 받은 그 은혜로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므로 대접하고 봉사해야 한다. 물질이나, 마음이나, 정성이나 무엇이든지 희생해서 형제를 구원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11가지 은혜를 받았다. 그것은 사죄로 죄와 마귀와 사망에서 해방과 자유, 칭의, 화친, 하나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소망과 믿음, 진리로 영생, 영감으로 영생,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이다. 이러한 사활대속은 우리의 것이 되고, 구속받은 우리는 주님의 것, 주님의 종, 주님의 몸과 지체, 주님의 성전이 되었다. 이는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생명이다. 이 생명과 능력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갈 수 있다. 따라서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므로 이 11가지 은혜로 형제를 대접해야 한다. 받아서 주고, 주면 또 받아서 점점 풍성하고 나누어줄 수 있는 자로 온전하여 가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아버지에게 구하여도 남을 대접하지 않는 자는 구하는 것을 얻으리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구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사욕으로 사용하려고 잘못 구함이다. 또 구하면 반드시 주시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구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약 1:5-8). 또 믿음으로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얻은 것을 바로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주님은 말씀한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믿음으로 구하고 그 사람이 되면 소원이 성취되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며 선지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고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예언된 말씀은 그대로 성취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7:13-14
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본문에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말씀한다. 멸망이 무엇이고, 생명이 무엇인가?
멸망은 세상에서 죽음으로 끝나는 세상의 멸망과 그 멸망이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해서 계속되는 영원한 멸망이다. 이 멸망은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없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단절되면 영과 육, 인격과 행위, 소유와 평강이 다 없어지게 된다. 멸망은 자체 멸망, 활동 멸망, 소유 멸망, 영광 멸망, 영원한 멸망 등이다.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맺어져서 하나님의 모든 은혜로 살고 자라며 번성하여 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는 세상에서 죽어도 살아나고, 살아서 믿는 자는 그 생명으로 영생한다(요 11:25-26). 자연계시에서 ‘어떤 사람이 권위가 있고 소유를 많이 가진 사람을 알고부터 그 혜택으로 형편이 좋아지고 지위가 올라가고 점점 좋아 진다’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좋아지면 하나님의 인정과 돌보심과 하나님의 지능이 함께 하시는 그 효력이 그 형편에서 나타나고 좋아지는 것이 필연적이다. 그래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고 그 은혜와 복을 받아 영생하는 길이다(요 3:16-21).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며, 진리시고, 생명이시다(요 14:6).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도성인신 하시고 사활로 대속하셔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새 창조 하시고, 하늘과 땅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새 창조하신다. 지금은 우주와 영계가 나뉘어 있지만 통일이 될 때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실과 거룩과 지혜와 능력이 그 안에 충만하고 그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새 창조하시며 홀로 주권주재 하신다.
그러므로 멸망은 창조주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그 은혜가 완전히 영원히 끊어지는 것이고,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로 살아나고 그 은혜와 복을 받아 점점 충만해서 번성하고 영생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이 있고, 영생하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이 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자는 악령이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자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인류시조 때부터 악령은 하와와 아담을 멸망으로 인도했고, 부정모혈로 나는 모든 자연인도 멸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죄와 마귀와 사망 안에서 출생한다. 이러한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입혀주시고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해서 승리할 것을 예언하셨다(창 3:15). 그 약속대로 하나님은 신인양성일위로 도성인신 하시고 사활로 대속하심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며, 진리시고, 생명이 되셨다. 그때부터 인생에게는 두 길이 나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으로 성령이 인도하시는 생명 문이 생겨졌고, 악령이 미혹하는 사망의 문도 생겨졌다.
그러므로 영생하는 생명 길은 성령이 영감과 진리로 인도하시고, 멸망하는 사망의 길은 악령이 미혹하여 정과 욕심으로 인도한다. 사람은 두 인도에서 어느 인도를 받든지 받게 되지 독행하지 못한다. 그것은 사람이 독존자가 아니고 의존자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현실에는 멸망의 길과 생명의 길, 두 길이 있다. 생명이 떠나면 장사의 몸이라도 죽고 썩어서 냄새가 난다. 어떤 생명체라도 생명이 오면 나쁜 것은 제거되고 점점 소생하며 성장하고 번성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멸망하기를 바라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멸망을 피하고 생명을 취하려고 노력한다. 두 길이 우리 앞에 있는데 ‘생명 길을 가느냐?’ 아니면 ‘사망의 길을 가느냐?’를 생각하지 않고 만물보다 거짓된 자기의 생각과 욕심으로 가면 되는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에게 좋은 대로 하는 것이 생명으로 가는 길인 줄 알지마는 그것은 함정이다. 악령의 미혹이다. 사람의 멸망과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이 주권하시면서, 우리에게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을 내어놓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 선택하게 하신다. 우리가 사망의 길을 택하면 악령의 인도를 받게 되고, 생명의 길을 택하면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된다.
우리의 현실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길이 있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과 길이 있다. 어느 길을 가야 하는가의 선택은 우리의 자유이다. 이 자유를 가지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영감과 진리를 따라 가느냐? 아니면 자기의 정욕을 따라서 악령의 미혹을 받아 가느냐? 이것은 우리의 자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과 보응이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감과 진리의 길로 인도함을 받지 못한다.
우리의 현실은 수많은 문으로 되어있다. 현실을 문으로 말씀하는 것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은 닫혀버리기 때문에 두 번 만나는 현실이 없다. 우리는 중복이 없는 인생을 산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만나는 현실은 평생에 처음 만나는 현실이다. 또 생명과 멸망이 영원히 결정되는 현실이다. 다음에 만나는 현실은 새로운 현실이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뿐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영원한 멸망이 되는 문과 영생이 되는 생명 문, 둘이 있다. 믿는 사람들은 영생하는 생명 길을 가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시간, 그 장소, 그 사건에서 생명이냐 아니면 사망이냐 결정되는 것은 그의 신앙 행위로 말미암은 기능이 성화되느냐 아니면 멸망하느냐 하는 것이 영원히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중요하다. 믿는 사람들은 생명 길로만 가지 않고 사망의 길로도 가는 것이 문제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해서 찾는 자가 적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현실에서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곧 영감과 진리를 찾기가 어렵고, 찾는 이가 적으며, 그 좁은 길을 가는 사람도 적다. 우리는 자기의 현실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을 어떻게 찾고 들어갈 것인가? 이 길은 하나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소망과 믿음으로 가는 길이다. 피조물을 소망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을 소망하고 믿는 것이 어렵고 힘이 드는 세상이기 때문에 좁고 협착하다. 또 죄가 없는 길이며 범죄하지 않는 길이기 때문에 찾기가 쉽지 않다. 또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전적 피동되는 의로운 길이며, 하나님과 동거동행 하는 생명 길이기기 때문에 찾기가 어렵고 찾는 사람도 많지 못하다.
우리는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을 입었고,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하나님의 아들로 구속함을 받았다. 수많은 넓은 길을 버리고 좁은 생명 길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다. 이 문을 찾아 열고 들어가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먼저 우리는 자기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기의 현실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현실을 떠나면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곧 영감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한다. 현실을 주권하고 주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소망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해야 한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만물과 함께 주권하고 주재하시기 때문에다. 하나님보다 만물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자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
2) 자기를 성전 삼으시고 내주하시는 하나님을 찾고 만나야 한다. 스스로 자기에게 있는 모든 허영과 허욕, 주관과 거짓을 먼저 자기가 부인해야 한다. 자기를 깨끗하게 함으로 진실한 양심을 길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신앙양심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 간다.
3) 진리와 함께 진리대로 진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찾고 만나야 한다. 진실한 양심이 자기의 현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펴야 한다. 진실한 양심으로 진리를 믿고 따라가는 것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4) 영감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가 모든 거짓을 버리고 진리대로 믿고 순종하면 성령이 감동하여 진리대로 인도하여 주신다. 성령이 감동하시는 영감과 진리를 믿음으로 순종하는 길은 생명으로 인도받아 가는 길이다. 이 길은 참되고 거짓이 없으며 영원하고 완전한 길이다(요일 2:27).
불택자는 멸망으로 인도함을 받으나, 하나님의 택함과 창조와 대속과 중생으로 믿는 사람들은 영생하는 생명 길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 기본구원이다. 그런데 중생해서 믿는 사람들에게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두 문과 두 길이 있는 것은 건설구원이다. 우리는 두 문과 두 길을 자기의 현실에서 깨달아 알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을 선택하여 가야 한다. 그러면 우리 생명이신 구주 하나님의 지혜, 능력, 사랑, 거룩, 진실 등의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우리에게 충만하고 모든 만물들에게도 충만하여 나타나고 하나님이 영광이 나타난다.
자기의 주관과 지식을 따라서 두 문과 두 길을 구별하지 않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로 가면 무엇이 멸망하는가? 그것은 심신의 기능이 성화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격과 행위가 성장하지 못한다. 이것은 영생하는 구원을 얻어도 불 가운데서 얻은 것과 같은 부끄러운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문과 두 길과 두 인도자를 구별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로 가야한다. 주님이 성령과 진리로 인도하는 길은 주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죄 없이 의롭게 삶으로 주님과 동거동행 하는 길이다. 이 길은 좁고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으나 영생하는 생명 길이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7:15-20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예수께서 사활로 대속해서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은 좁은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인도하시는데 거짓 선지자는 거짓말로 하나님의 양들을 넓은 길로 인도하고 멸망하게 한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우리의 신앙지도자를 구별하여 참 선지자의 인도를 받도록 하고 거짓 선지자의 지도를 삼가야 한다. 자신이 성경과 성령을 따라 거룩하고 진실하므로 참 선지자가 되어야 자기 양을 좁은 길로 인도할 수 있게 되고, 또 자기의 지도자를 구별하여 거짓 선지자의 지도를 벗어나고 참 선지자의 지도를 받지 않으면 좁은 문과 길로 인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지혜 지식을 전달하는 자이다. 사람들이 세상을 사는 것은 자기가 아는 지식대로 산다. 그 지식의 수가 많으면 행동의 수도 많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지식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인생에 대한 지식, 세상에 대한 지식이 심히 많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의 지식 외에는 다 죽은 지식이며 죽이는 지식이다. 그 한 가지 산지식이며 살리는 지식은 영감계시로 나타난 하나님의 지식이다. 하나님의 지식으로 들어가는 문과 길이 좁은 문과 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선물을 주실 때에는 직접 주시지 않고 성도들에게 지식으로 주신다. 그 지식을 우리가 받아서 그대로 행하면 구원도 되고, 하나님의 선물도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진리를 통해서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영감과 진리이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감화 감동하시면 우리 마음이 성화되고, 그 능력이 오면 우리의 움직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서 우리의 구원이 된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진리를 바로 깨달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을 영접하는 것이다. 또 바로 깨달은 진리대로 행하는 것이 성령의 권능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아 알고 믿음으로 신앙양심이 살아나야 하고, 다음으로 깨달은 진리대로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이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깨달은 대로 실행할 때에 주님이 동행하여 주시므로 실행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하나님께서 갖추어 충만하게 주신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지혜 지식을 전달하는 일꾼이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바른 일을 하지 아니하는 자이다. 거짓 선지자는 자기 속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티를 지적함으로 비판을 받게 된다. 따라서 자신이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거짓 선지자에게 미혹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었으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이다. 겉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사죄와 칭의와 새 생명과 영생을 받아 주님의 구속받은 자라고 자기도 말하고 다른 사람들도 말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자타가 알지만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가 되어 말하는 자가 거짓 선지자이다. 속에는 우리의 구원을 삼키는 옛사람으로 되어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사장, 선지자, 왕의 직분을 다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중생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성령이 중생된 영으로 더불어 자기 안에 심신을 다스리는 주인이 되지 못하고, 악령이 자기의 주인이 되고 악성과 악습대로 움직이는 자는 거짓 선지자이다. 거짓 선지자는 겉은 새사람이고 속은 옛사람이다. 믿는 행동은 하지만 속에는 옛사람이 주관해서 자기를 위하여 전적 산다. 자기에게 유익하려는 목적 달성하기 위해서 행함으로 안 믿을 때의 옛 사람보다도 더 고급 옛 사람이다. 아주 지능적인 옛 사람이다. 양의 옷을 입고 오나 양을 노략질하는 이리가 되어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한다.
16-20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거짓 선지자들을 알 수 없으면 그의 열매를 보아서 알 수 있다. 그 나무에 그 열매를 맺게 된다. 포도나무에 포도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가지이므로 가지에 예수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요 15:1-8). 예수님의 열매는 성령과 진리의 열매이다. 또 무화과나무는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맺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화과나무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면 주님의 나라가 건설된다. 그러나 가시나무와 엉겅퀴에는 무슨 열매가 맺는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거하는 땅에 가시와 엉겅퀴가 있었다. 가시와 엉겅퀴의 열매는 죄와 마귀와 사망의 열매를 맺는 것뿐이었다. 가시나무에 포도를 맺을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 아름다운 나무가 무엇이며, 아름다운 열매가 무엇인가? 땅위에 아름다운 것은 하나도 없다.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보시고 ‘보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셨다. 그 후에 인간이 범죄하므로 세상은 죄와 마귀와 사망 아래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은 하나도 없다.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아름답다’는 말은 ‘흠이 없고 좋다’는 말이다. 아름다운 나무는 하나님 한 분뿐이시고, 아름다운 열매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이루어진 것이 아름다운 열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몸이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깨끗하여 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그의 형상을 우리가 덧입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주님은 부르셨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열매는 심판이 와도 정죄 못하고, 마귀가 와도 송사 못하고, 사망이 와도 죽일 수 없으며, 세월이 어떻게 가도 그를 썩힐 수 없는 영원성, 완전성, 불변성의 것들을 가리켜서 아름다운 열매라 한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는 그에게 이루어진 것이 순전히 하나님과 진리로 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인간 세력이나 인간 지식이나 어떤 그 과학이나 어떤 문화나 어떤 물질이나 어떤 권세나 그런 것으로 되었는지 그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쁜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된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그 나무는 영원한 불못 곧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된다. 거짓 선지자의 행위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 7:21-23
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그것이 구원이다. 많은 진리가 있지만 자기 현실에서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이 자기에게 알려주는 것은 양심의 귀로만 듣지 다른 귀로서는 듣지 못한다. 신구약 성경 말씀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지켜야 할 장소가 있고, 때가 있고, 또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키라 할 때에 지키는 것이 그에게 대한 주님의 뜻이다. 이대로 행한 것이 구원이 된다. 그런데 자기 뜻대로 전도하고, 또 이적을 행하고, 또 귀신 쫓아내고 하는 것이 구원이 된 줄로 가르친 것이 거짓 선지자이다.
또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되는 것도 아니다. 성경 읽는 것은 구원을 이룰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는 것도 구원이 아니다. 기도도 구원을 이룰 수 있는 모든 은혜를 하나님께 부탁해서 구하는 것이다. 전도하는 것도 구원은 아니다. ‘네가 남의 죄를 사해주지 아니하면,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천부께서도 너를 용서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를 죄악에서 구출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주님이 주기도문에 가르쳤다. 자기 현실에 하나님과 진리와 자기와가 삼합이 되어 가지고 움직인 그것이 구원이다.
우리가 이런 일을 많이 했으니까 구원을 줘야 되지 않습니까? 하니까 그때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그러면 전도한 것이 불법인가? 불법이 아니다. 선지자 노릇한 것도 불법이 아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 불법인가? 불법 아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능한 일 한 것이 불법인가? 불법 아니다.
불법이 아니면 무엇이 불법인가? 각각 자기의 현실에서 자기의 인격과 양심을 기울이면 성령님께서 감동하셔서 ‘이렇게 해라’ 하는 그 법대로 행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의 법이다. 그것이 영생하는 법이다. 구원에 대해서 ‘불법이다’ 하는 것은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아니한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선지자 노릇하고, 능한 일하고, 주여 주여 부르고 누가 봐도 예수 믿는 사람으로 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구원이 없다 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다 기본구원을 얻어 천국의 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 공로로 간다. 천국의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영생하는 성화의 구원을 얻고 못 얻는 것을 말씀한다. 불법을 행하면 성화가 건설되지 못한다.
주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행하는 자와 행치 않는 자가 다르다. 자기의 현실에서 성령의 감화 감동이 와서 ‘이렇게 해라’ 기름부음이 옳고 바르고 참되게 가르친 그대로 행한 것만이 구원이 된다(요일 2:27). 그것이 아니고 껍데기 외식만 갖춰서 하는 이것이 구원인 줄 아는 사람과 또 그것이 구원인줄 알고 그대로 구원을 이룬 사람과 시험하는 시험이 올 때에 들어나게 된다. 불법은 성령이 가르쳐주시는 영감과 진리가 아니면 다 불법이다. 하나님의 법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없으면 기본구원은 얻어서 천국을 가도 성화의 구원을 건설하지 못함으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시는 것입니다. 성화구원을 건설한 것만 가지고 부활하고 영생한다.
천국 건설 7:24-27
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1-23절을 결론하여 “누구든지”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택함과 대속과 중생으로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하는 말씀이다. 믿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는가? 각각 자기의 현실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성경의 진리대로 행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므로 심령을 깨끗하게 하면 성령이 감동하시는 진리대로 믿고 행할 때 주님이 동행하여 주신다. 성도가 영감과 진리대로 믿고 순종하면 주님이 건설하여 주시는 신령한 전이 지어진다.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시다(고전 3: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기본구원을 믿는 믿음 위에 성화구원이 건설되는 것은 영원하고 완전하다.
우리의 성화구원은 세상의 시험과 시련을 통과해서 승리한 것이 구원된다. 어떤 시험이 오느냐?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건설한 것이 무너지지 아니해야 성화구원이 건설된다. 그것은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라고 말씀한다. 주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그 집을 모래 위에 건설한 것과 같아서 무너지는 것은 성화구원이 건설되지 아니함을 말씀하는 것이다.
‘비가 온다’는 것은 세상에 모든 좋은 것을 다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창수가 난다’ 말은 비가 오는 것이 심해서 큰 화가 되는 것을 말한다. 반드시 좋고 난 다음에 뒤에는 나쁜 것이 온다. 사람의 멸망이 구원에서 나온다. 실패는 성공에서 나온다. 또 ‘바람이 분다’ 그 말은 모든 운동들이다. 사망운동, 저주운동, 사상운동, 새마을 운동, 이 모든 운동들이다. 비 오고, 창수 나고, 바람 부는 것을 세 가지로 말한 것은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우리의 구원을 해할 수 있는 그 전부를 총칭해서 말한다.
세상에 무엇이 있는가? 세상에 인간이 있다. 물질이 있다. 마귀가 있다. 사망이 있다. 크게 말하면 이 네 가지가 있다. 이 네 가지가 넘어뜨려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 영생하는 구원이다. 무너지지 않는 것은 주초가 반석이냐 아니면 모래이냐? 둘 중에 하나이다. 여기 반석은 조물주 완전자 영원자 불변자 하나님을 말씀한다. 그분이 현실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실 때에 그 뜻에 따라서 그대로 행한 것만 건설구원이 된다. 하나님의 뜻이 근거되지 못하면 어떤 것이라도 다 모래 위에 주초를 삼은 어리석은 자라는 말씀이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지 못하므로 삼가라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종들이지만 이 구원에 대해서 잘못 가르치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이다. 아무리 선지자 노릇하고, 능한 일하고, 귀신 쫓아내지만, 그것이 구원인줄 아는 그것이 자기 구원도 이루지 못 할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이것이 구원이다’ 했기 때문에 구원에 대해서는 잘못 가르치는 거짓선지자이다. 거짓 선지자는 껍데기는 양이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이다.
껍데기는 예수 믿는 사람이 주의 것 되고, 주님으로 움직이고, 주님을 부르고, 주님을 찬양하고 하지만 속에는 자기가 중심이 돼서 자율로, 육체의 소욕으로 살기 때문에 속에는 바꿔지지 않는다. 속에는 옛사람이 주인공 되어있고, 하나님과 진리로 중생된 영이 주인 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 하나님과 진리로 중생된 영이 심신의 주인이 되도록 자기를 거룩하고 진실하게 하는 것이 먼저 중요하다.
그래도 거짓 선지자를 모르느냐? 그러면 그 열매를 그 나무를 보면 알 수 있다. 영원하고 완전한 행위의 결과를 맺는 것이 우리의 건설구원이다. 완전한 구원은 완전한 나무에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으로 인하여서만 썩지 않고 쇠해지지 않고 더럽지 않고 병들지 아니하고 완전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 맺어진다.
주여! 주여! 부르며 천국의 구원을 얻은 자라도 불법을 행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이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지 못하면 함께 불법을 행하고 건설구원을 이루지 못한다. 하나님의 감동하시는 영감과 진리를 따라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행위는 반석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무너지지 않는다. 오늘 당면한 현실에서 내가 지켜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성도이다. 이렇게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고 삼가야 한다. 참 선지자와 함께 하는 자는 미련한 자가 아니다.
우리가 성화구원을 건설했으면 세상의 어떤 시험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의 구원을 시험하여 보면 안다. 우리는 시험해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자신을 확실히 확정해야 한다.
어떻게 시험하는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이 있다. 우리의 희로애락, 지정의, 언행심사 이것이 현실 현실마다 부딪힐 때에 반석 위에 지은 것으로 요동이 되지 않는가? 아니면 모래 위에 지은 것으로 요동이 되는가? 요동되지 않으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요동이 되면 그리스도의 삶이 아니고 스스로 사는 것이다.
반석 위에 지은 건설은 하나님과 진리로 인한 신앙 행위이다. 또 모래 위에 지은 건설은 피조물로 인한 행위이다. 피조물로 인한 것은 전부 무너지는 것이다. 비, 창수, 바람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권세 영광 물질 학문 사상으로써 최종은 무슨 권세가 있는가? 죽고 망하는 권세뿐이다. 마귀 권세이며 죄악의 권세이고 사망의 권세이다. 죄악으로 더 빛나고, 마귀로 더 승리하고, 죽음이 와도 더 승리로 나타나고 세상 좋은 것, 두려운 것, 흉한 것, 고통스러운 것이 와도 흔들어 넘어뜨릴 수 없는 것은 반석 위에 건설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진리를 바로 깨닫고 믿어야 한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지 못하면 모래 위에 건설하고도 무너지지 않는 줄 알기 때문에 일생을 속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말씀을 한다.
예수님 설교에 대한 제자들의 응답 7:28, 29
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이 끝날 때 마태는 무리들이 그의 교훈에 대한 반응을 말씀한다. 무리들은 그의 가르치는 교훈에 있어서 그 이전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교훈에 놀라고 권위있는 말씀으로 깨달았다. 그 놀란 것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하는 말씀이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심판주이심을 나타낸 것은 보통 사람들과 동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리들은 당시 율법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에게 배웠다. 이들과 비교할 때 갈릴리 목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은 자신이 계시의 주체가 되어 진리를 선포하므로 권세있는 자같이 생명과 능력이 있는 말씀이었다.
제목: 천국 건설
요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절)
5-7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으로서 7장에서도 천국 시민으로서의 지켜 순종해야 하는 새 계명을 예수께서 말씀하여 주신다. 1-5절은 자기를 비판하라, 6절은 거룩하고 진실하라, 7-12절은 믿음으로 구하고 소원성취 하는 사람, 13-14절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15-20절은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21-23절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 24-27절은 천국 건설, 28-29절은 예수님 설교에 대한 제자들의 응답을 말씀한다.
자기를 비판하라 7:1-5
1-2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비판하는 것은 형제에 대하여 정죄하거나 심판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형제에 대하여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바로 자기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사람을 판단하는 자는 사람에게 판단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게 된다. 비판하는 사건마다 심판이 따르면서 하나님의 최종 심판도 따르게 된다.
그러면 무슨 일이든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거룩하므로 진실에 이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볼 때에 마치 하나님의 심판 위치에서 형제를 정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긍휼히 여기고 위하여 기도하며 따라가거나 협력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아 보고 자신을 더 깨끗이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은 죄인이고 자기는 의인인 것처럼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월권이면서 자기의 교만함을 나타내는 결과가 된다(롬 2:3).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고 희생함으로 봉사할지라도 범죄에는 경계해야 한다.
사랑과 긍휼이 없는 자에게는 사랑과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마 18:21-35). 우리가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똑같이 입었다(롬 3:22). 무한한 사죄와 칭의와 화친과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으로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은혜를 깨달아 감사하고 우리도 형제에 대하여 사랑하고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형제도 나와 같이 사죄하여 주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형제를 비판하면 비판을 받게 되고, 헤아리는 것으로 우리도 헤아림을 받게 된다. 형제에 대한 사랑과 긍휼은 곧 자기에게 대한 사랑과 긍휼이다.
거룩함과 화평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한다(히 12:14). 거룩하고 진실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함으로 화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거룩함으로 구별하여도 사랑함으로 화평을 이루지 못하여도 안 되고, 사랑함으로 화평하여도 거룩과 진실이 없어도 안 된다. 거룩하고 진실하면 사랑함으로 화평을 누리게 되고, 우리가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화평을 누리면 그 속에 거룩과 진실이 있어야 한다. 비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으로 구별하고 자기에게 대해서 진실하지 못하고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자기가 판단을 받게 된다.
3-5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하여도 진실하지 못한 자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아도 자기의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중심의 사람이다. 티는 작은 죄악이지만 들보는 티보다 더 큰 죄악을 비유한다. 이러한 죄는 남을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흔히 범한 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깨닫지 못하고 율법으로 사람들을 정죄하였다. 그들은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범죄하고 타락한 사람은 중생하여 믿는 사람이라도 옛 사람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믿지 아니 하는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게 된다. 이것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별은 하여도 그것을 자기의 복음으로 받지 못한다. 복음으로 받는 사람은 자기가 아는 대로 자기의 죄를 찾아 회개함으로 진실하고 겸손한 자가 되고, 그래도 자기에게 막혀 있는 죄악을 형제에게서 작은 죄악이라도 자기 속에 더 큰 죄악을 발견함으로 회개를 한다. 이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자기보다 더 낫게 여기고 작은 죄를 용서한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사죄하여 주었는데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못할 죄악이 있겠는가? 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므로 자기의 죄악을 찾아 회개함으로 성령의 감동하시는 진리를 깨달아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뽑는 일은 주님이 성령으로 역사하여 주신다. 자기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뽑으려고 하면 뽑지도 못하고 다시 비판과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지체이므로 한 형제들이다.
자기의 죄악을 회개하지 않으면서 형제의 죄악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외식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별하는 거룩은 가져도 진실은 없기 때문에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게 된다. 진실하지 못하면 서로 사랑함으로 화평함도 이루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 거룩함으로 진실함에 이르고 희생함으로 화평함을 가진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단일교회가 되지 못하면 영생하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거룩하고 진실하라 7:6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정상의 사람이라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줄 수 없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질 수 없다. 그것을 던지면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발로 밟을 뿐 아니라 도리어 상하게 한다는 말씀이다. 거룩한 것은 성결한 하나님의 복음을 말씀한다. 진주도 영원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복음을 비유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 완전하며 불변하고 거짓이 없는 진리이다(마 13:44,45).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복음으로 받으면 자체와 행위는 거룩하게 되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진주라고 한 것은 복음으로 받으면 자기는 하나님 형상대로의 사람으로 존귀하여 지고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영광스럽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받으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자가 되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자가 된다. 개와 돼지는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다. 사람이 범죄하고 타락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사람이라도 본질과 본성을 상실함으로 수성화(獸性化)된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복음을 훼방하는 “개”와 “돼지” 같은 자들이었다. 개와 돼지는 거룩한 것과 귀한 보석을 구별하지 못한다. 거룩하고 진실함이 없으며 외식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깨닫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한다. 그들은 그것을 도리어 해한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잡아서 죽이기까지 하여 복음을 핍박하였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예언이다. 거룩하고 보배로운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고 진실한 자들에게 길이 되고 생명이 되는 복음이다(계 3:7, 8).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이며 지식이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거룩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영광스럽고 존귀하게 된다. 거룩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은 죄와 의, 참과 거짓, 선과 악, 복과 저주 둘로 구별하여 거짓을 버리고 참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선하고 의로우며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주권능력을 힘입고 존귀하게 된다. 대속하신 주 하나님은 성령과 말씀으로 감동하시고 가르쳐 거룩하고 진실하게 신앙생활 하게 하신다. 이 거룩과 진실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가는 열쇠이다. 거룩은 가지고 자기에게 진실을 가지지 않고, 형제에게 악하다, 거짓되다, 죄가 된다 등으로 정죄하고 심판하면 자신이 하나님 위치에서 교만하게 되고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게 된다.
우리는 거룩과 진실을 가져야 한다. 거룩과 진실을 가진 성도는 선하신 주님을 모시고 주님 시키시는 대로 순종해서 의에 이르고 주님 사랑 안에 거하여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구하는 것을 얻고 찾으며 문이 열리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형상대로의 사람이 되어 현실만 상대하여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거룩하고 진실하므로 주님을 먼저 우리 안에 모시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면 주님이 다 시행하여 주신다. 하나님 형상대로의 사람으로 행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믿음으로 구하고 소원성취 하는 사람 7:7-12
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형상대로 사람으로 사는 자이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주권통치에 완전 복종하는 자이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간구하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보고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딤전 4:5; 벧전 1:22, 23; 요일 3:3). 심령의 눈이 밝아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고 간구하는 기도를 할 수 있다(롬 12:2).
하나님의 아들들은 금생과 내세에 있어서 구원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이 많다. 이런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구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이 모든 것이 주권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지극히 크시고 무한하시며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소망하는 것을 구하라고 하신다(약 1:5-8).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시려고 명령하고 계약하며 현실로 인도하신다. 내게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것이고, 또 하나님의 것을 받아야 우리는 그것으로 구원을 이루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지혜, 소유, 능력, 사랑, 지식, 권세 등을 받지 않으면 없다. 우리는 영과 육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소망하고 믿음으로 구하면 받게 된다. 소망과 믿음으로 간구하는 기도와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편이다. 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아니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약 4:1-3).
우리에게 궁핍한 것은 근검절약 하지 아니함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구하지 아니해서 궁핍하다.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다(약 4:2-3).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한다(마 6:33).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루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꾸짖지 아니 하시고 반드시 더하여 주신다(약 1:5).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주실 때까지 구해야 한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에게 이 모든 것이 홀로 하나님에게 주권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간구하는 기도를 하다가 응답이 없다고 쉽게 낙심한다. 기도를 계속하지 못하고 중단한다. 그것은 이전에 구함으로 받은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멸망하게 된 것이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홍해를 건너게 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잊어버린 까닭이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으로 역사하여 주신 은혜를 잊어버렸으면 다시 찾아서 우리의 소망과 믿음을 더욱 더 견고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찾는 자마다 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 능력을 찾아 깨닫고 믿게 되는 것이다. 찾는 것은 잊어버린 것을 찾는 경우도 있지만 기도하여 구한 대로 그 실상을 얻으려고 그 방편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서 찾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다(롬 12:2). 하나님의 받은 은혜를 깨달아 알고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믿음으로 간구하여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찾지 못하면 그 뜻대로 행하지 못한다. 왜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는가? 그것은 닫혀있는 문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비밀이다.
그러므로 그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려야 한다(계 3:20). 그 문은 심령의 문이다. 자기의 죄로 가루어져 있는 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형제의 눈에 티가 보이면 자기의 눈에 들보를 발견하고 그 들보를 제거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자기를 거룩하게 해야 한다(딤전 4:5). 주님은 문을 두드리면 열어주신다. 우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가야 한다(사 26:2). 주님은 심령의 눈을 밝게 하여 주시고, 우리는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고 새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주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가 믿고 순종하면 구하는 것이 실상 된다. 우리에게 해되는 것을 제하고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하고, 그 방편을 모르면 그것을 찾아야 하고, 그것을 찾아 만나면 알게 되고 잊어버린 것을 찾으면 가지게 된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찾아서 의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두드리면 열어주신다.
다만 구하지 아니하면 얻지 못하고, 찾지 않으면 만나지 못하고, 문을 두드리지 아니하면 열고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가 아무리 구하여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믿음에 거하지 못하고, 문을 두드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여 주시는 것을 받지 못한다. 응답하시는 주님은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성도가 삼중으로 간구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또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하여 주시는 것을 말씀하신다. 세 가지로 구하고 노력하면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은 반드시 성취하여 주신다. 필요와 가치를 따라서 구하면 얻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찾으면 찾게 되고, 나아가는 길이 막힌 문을 두드리면 문을 열어주시고 그 길을 가게 하신다. 이 세 가지 성도의 간구와 노력으로 성도의 소원은 성취된다.
9-11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아들이 부모에게 떡을 달라고 구하면 돌을 주거나, 생선을 달라고 하면 뱀을 주는 부모는 아무도 없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해롭거나 필요가 없는 것을 주지 않고 필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준다. 성도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주의 이름으로 간구할 때에 보배롭고 필요한 것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틀림없이 얻고 만나고 열어주시는 것을 확신하게 하는 말씀이다. 구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구하라는 것이고, 그것을 주실 때는 성령과 말씀 곧 영감과 진리로 주신다. 그 영감과 진리대로 믿고 순종하면 그 실상이 된다. 그러므로 성도가 기도할 때에 믿음으로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한다(막 11:24).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는 말씀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반드시 주신다는 말씀이다. 인간은 선하게 지음을 받았으나 타락한 이후에 원죄와 본죄로 악하게 되었다(시 14:1-3; 53:1-3; 전 7:20; 롬 7:19-21). 악령, 악성, 악습으로 악한 자이지만 자기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반면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선하며 의롭고 완전하시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들이 간구할 때에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좋은 것이 무엇보다 성령이시다(눅 11:13).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또 그들은 기다렸다(욜 2:28-29). 성령이 임하시면 모든 좋은 것이 완성되고 영원 완전한 것이 건설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으로 구하고, 믿음으로 찾고, 믿음으로 문을 두드리는 자마다 반드시 받게 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주권을 돌리는 것이며, 우리의 소망과 믿음을 하나님께 두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아 영생하게 하려 함이다. 하나님에게 받지 아니하면 불쌍하고 가련한 것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성령과 말씀으로 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 믿음으로 순종하면 우리에게 필요하고 좋은 것이 된다. 인간의 간구와 노력에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전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시면 우리의 소원이 성취된다. 이 두 가지를 믿는 믿음이 없으면 소원은 성취되지 못한다.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능력이 합하여 성취되는 것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 역사에 인간의 믿고 순종하는 행위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소원성취이다. 이러한 소원이 성취되는 데는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받은 것을 심어야 할 씨와 먹어야 할 양식을 구별해야 한다. 씨와 양식을 구별하지 않고 다 양식으로 먹으면 심을 씨가 없기 때문에 다음에 추수할 것이 없다. 그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에게 받은 것을 우리는 먼저 씨와 양식을 구별하고, 그 다음에 씨는 심고 양식은 먹어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영적 물적 은혜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우리도 남에게 대접을 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고 선지자가 해야 하는 일이다. 남에게 대접은 받으려 하고, 남에게 대접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구하는 것을 주실 수 없다는 말씀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그것이 자기에게 있어서 남에게 먼저 대접하는 하나님의 법이 자기에게 있고 그것을 알게 하는 선지자가 자기 속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씨와 양식을 구별하는 사람이 되어야 구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받을 수 있다. 받은 것을 정욕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사람은 배나 악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주실 수 없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므로 주신 은혜를 깨달아 감사하고, 받은 그 은혜로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므로 대접하고 봉사해야 한다. 물질이나, 마음이나, 정성이나 무엇이든지 희생해서 형제를 구원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11가지 은혜를 받았다. 그것은 사죄로 죄와 마귀와 사망에서 해방과 자유, 칭의, 화친, 하나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소망과 믿음, 진리로 영생, 영감으로 영생,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이다. 이러한 사활대속은 우리의 것이 되고, 구속받은 우리는 주님의 것, 주님의 종, 주님의 몸과 지체, 주님의 성전이 되었다. 이는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생명이다. 이 생명과 능력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갈 수 있다. 따라서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므로 이 11가지 은혜로 형제를 대접해야 한다. 받아서 주고, 주면 또 받아서 점점 풍성하고 나누어줄 수 있는 자로 온전하여 가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아버지에게 구하여도 남을 대접하지 않는 자는 구하는 것을 얻으리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구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사욕으로 사용하려고 잘못 구함이다. 또 구하면 반드시 주시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구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약 1:5-8). 또 믿음으로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얻은 것을 바로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주님은 말씀한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믿음으로 구하고 그 사람이 되면 소원이 성취되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며 선지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고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예언된 말씀은 그대로 성취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7:13-14
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본문에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말씀한다. 멸망이 무엇이고, 생명이 무엇인가?
멸망은 세상에서 죽음으로 끝나는 세상의 멸망과 그 멸망이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해서 계속되는 영원한 멸망이다. 이 멸망은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없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단절되면 영과 육, 인격과 행위, 소유와 평강이 다 없어지게 된다. 멸망은 자체 멸망, 활동 멸망, 소유 멸망, 영광 멸망, 영원한 멸망 등이다.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맺어져서 하나님의 모든 은혜로 살고 자라며 번성하여 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는 세상에서 죽어도 살아나고, 살아서 믿는 자는 그 생명으로 영생한다(요 11:25-26). 자연계시에서 ‘어떤 사람이 권위가 있고 소유를 많이 가진 사람을 알고부터 그 혜택으로 형편이 좋아지고 지위가 올라가고 점점 좋아 진다’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좋아지면 하나님의 인정과 돌보심과 하나님의 지능이 함께 하시는 그 효력이 그 형편에서 나타나고 좋아지는 것이 필연적이다. 그래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고 그 은혜와 복을 받아 영생하는 길이다(요 3:16-21).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며, 진리시고, 생명이시다(요 14:6).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도성인신 하시고 사활로 대속하셔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새 창조 하시고, 하늘과 땅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새 창조하신다. 지금은 우주와 영계가 나뉘어 있지만 통일이 될 때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실과 거룩과 지혜와 능력이 그 안에 충만하고 그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새 창조하시며 홀로 주권주재 하신다.
그러므로 멸망은 창조주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그 은혜가 완전히 영원히 끊어지는 것이고,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로 살아나고 그 은혜와 복을 받아 점점 충만해서 번성하고 영생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이 있고, 영생하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이 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자는 악령이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자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인류시조 때부터 악령은 하와와 아담을 멸망으로 인도했고, 부정모혈로 나는 모든 자연인도 멸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죄와 마귀와 사망 안에서 출생한다. 이러한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입혀주시고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해서 승리할 것을 예언하셨다(창 3:15). 그 약속대로 하나님은 신인양성일위로 도성인신 하시고 사활로 대속하심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며, 진리시고, 생명이 되셨다. 그때부터 인생에게는 두 길이 나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으로 성령이 인도하시는 생명 문이 생겨졌고, 악령이 미혹하는 사망의 문도 생겨졌다.
그러므로 영생하는 생명 길은 성령이 영감과 진리로 인도하시고, 멸망하는 사망의 길은 악령이 미혹하여 정과 욕심으로 인도한다. 사람은 두 인도에서 어느 인도를 받든지 받게 되지 독행하지 못한다. 그것은 사람이 독존자가 아니고 의존자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현실에는 멸망의 길과 생명의 길, 두 길이 있다. 생명이 떠나면 장사의 몸이라도 죽고 썩어서 냄새가 난다. 어떤 생명체라도 생명이 오면 나쁜 것은 제거되고 점점 소생하며 성장하고 번성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멸망하기를 바라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멸망을 피하고 생명을 취하려고 노력한다. 두 길이 우리 앞에 있는데 ‘생명 길을 가느냐?’ 아니면 ‘사망의 길을 가느냐?’를 생각하지 않고 만물보다 거짓된 자기의 생각과 욕심으로 가면 되는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에게 좋은 대로 하는 것이 생명으로 가는 길인 줄 알지마는 그것은 함정이다. 악령의 미혹이다. 사람의 멸망과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이 주권하시면서, 우리에게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을 내어놓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 선택하게 하신다. 우리가 사망의 길을 택하면 악령의 인도를 받게 되고, 생명의 길을 택하면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된다.
우리의 현실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길이 있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과 길이 있다. 어느 길을 가야 하는가의 선택은 우리의 자유이다. 이 자유를 가지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영감과 진리를 따라 가느냐? 아니면 자기의 정욕을 따라서 악령의 미혹을 받아 가느냐? 이것은 우리의 자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과 보응이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감과 진리의 길로 인도함을 받지 못한다.
우리의 현실은 수많은 문으로 되어있다. 현실을 문으로 말씀하는 것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은 닫혀버리기 때문에 두 번 만나는 현실이 없다. 우리는 중복이 없는 인생을 산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만나는 현실은 평생에 처음 만나는 현실이다. 또 생명과 멸망이 영원히 결정되는 현실이다. 다음에 만나는 현실은 새로운 현실이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뿐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영원한 멸망이 되는 문과 영생이 되는 생명 문, 둘이 있다. 믿는 사람들은 영생하는 생명 길을 가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시간, 그 장소, 그 사건에서 생명이냐 아니면 사망이냐 결정되는 것은 그의 신앙 행위로 말미암은 기능이 성화되느냐 아니면 멸망하느냐 하는 것이 영원히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중요하다. 믿는 사람들은 생명 길로만 가지 않고 사망의 길로도 가는 것이 문제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해서 찾는 자가 적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현실에서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곧 영감과 진리를 찾기가 어렵고, 찾는 이가 적으며, 그 좁은 길을 가는 사람도 적다. 우리는 자기의 현실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을 어떻게 찾고 들어갈 것인가? 이 길은 하나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소망과 믿음으로 가는 길이다. 피조물을 소망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을 소망하고 믿는 것이 어렵고 힘이 드는 세상이기 때문에 좁고 협착하다. 또 죄가 없는 길이며 범죄하지 않는 길이기 때문에 찾기가 쉽지 않다. 또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전적 피동되는 의로운 길이며, 하나님과 동거동행 하는 생명 길이기기 때문에 찾기가 어렵고 찾는 사람도 많지 못하다.
우리는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을 입었고,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하나님의 아들로 구속함을 받았다. 수많은 넓은 길을 버리고 좁은 생명 길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다. 이 문을 찾아 열고 들어가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먼저 우리는 자기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기의 현실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현실을 떠나면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곧 영감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한다. 현실을 주권하고 주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소망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해야 한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만물과 함께 주권하고 주재하시기 때문에다. 하나님보다 만물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자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
2) 자기를 성전 삼으시고 내주하시는 하나님을 찾고 만나야 한다. 스스로 자기에게 있는 모든 허영과 허욕, 주관과 거짓을 먼저 자기가 부인해야 한다. 자기를 깨끗하게 함으로 진실한 양심을 길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신앙양심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 간다.
3) 진리와 함께 진리대로 진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찾고 만나야 한다. 진실한 양심이 자기의 현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펴야 한다. 진실한 양심으로 진리를 믿고 따라가는 것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4) 영감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가 모든 거짓을 버리고 진리대로 믿고 순종하면 성령이 감동하여 진리대로 인도하여 주신다. 성령이 감동하시는 영감과 진리를 믿음으로 순종하는 길은 생명으로 인도받아 가는 길이다. 이 길은 참되고 거짓이 없으며 영원하고 완전한 길이다(요일 2:27).
불택자는 멸망으로 인도함을 받으나, 하나님의 택함과 창조와 대속과 중생으로 믿는 사람들은 영생하는 생명 길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 기본구원이다. 그런데 중생해서 믿는 사람들에게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두 문과 두 길이 있는 것은 건설구원이다. 우리는 두 문과 두 길을 자기의 현실에서 깨달아 알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을 선택하여 가야 한다. 그러면 우리 생명이신 구주 하나님의 지혜, 능력, 사랑, 거룩, 진실 등의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우리에게 충만하고 모든 만물들에게도 충만하여 나타나고 하나님이 영광이 나타난다.
자기의 주관과 지식을 따라서 두 문과 두 길을 구별하지 않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로 가면 무엇이 멸망하는가? 그것은 심신의 기능이 성화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격과 행위가 성장하지 못한다. 이것은 영생하는 구원을 얻어도 불 가운데서 얻은 것과 같은 부끄러운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문과 두 길과 두 인도자를 구별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로 가야한다. 주님이 성령과 진리로 인도하는 길은 주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죄 없이 의롭게 삶으로 주님과 동거동행 하는 길이다. 이 길은 좁고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으나 영생하는 생명 길이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7:15-20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예수께서 사활로 대속해서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은 좁은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인도하시는데 거짓 선지자는 거짓말로 하나님의 양들을 넓은 길로 인도하고 멸망하게 한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우리의 신앙지도자를 구별하여 참 선지자의 인도를 받도록 하고 거짓 선지자의 지도를 삼가야 한다. 자신이 성경과 성령을 따라 거룩하고 진실하므로 참 선지자가 되어야 자기 양을 좁은 길로 인도할 수 있게 되고, 또 자기의 지도자를 구별하여 거짓 선지자의 지도를 벗어나고 참 선지자의 지도를 받지 않으면 좁은 문과 길로 인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지혜 지식을 전달하는 자이다. 사람들이 세상을 사는 것은 자기가 아는 지식대로 산다. 그 지식의 수가 많으면 행동의 수도 많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지식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인생에 대한 지식, 세상에 대한 지식이 심히 많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의 지식 외에는 다 죽은 지식이며 죽이는 지식이다. 그 한 가지 산지식이며 살리는 지식은 영감계시로 나타난 하나님의 지식이다. 하나님의 지식으로 들어가는 문과 길이 좁은 문과 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선물을 주실 때에는 직접 주시지 않고 성도들에게 지식으로 주신다. 그 지식을 우리가 받아서 그대로 행하면 구원도 되고, 하나님의 선물도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진리를 통해서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영감과 진리이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감화 감동하시면 우리 마음이 성화되고, 그 능력이 오면 우리의 움직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서 우리의 구원이 된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진리를 바로 깨달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을 영접하는 것이다. 또 바로 깨달은 진리대로 행하는 것이 성령의 권능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아 알고 믿음으로 신앙양심이 살아나야 하고, 다음으로 깨달은 진리대로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이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깨달은 대로 실행할 때에 주님이 동행하여 주시므로 실행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하나님께서 갖추어 충만하게 주신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지혜 지식을 전달하는 일꾼이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바른 일을 하지 아니하는 자이다. 거짓 선지자는 자기 속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티를 지적함으로 비판을 받게 된다. 따라서 자신이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거짓 선지자에게 미혹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었으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이다. 겉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사죄와 칭의와 새 생명과 영생을 받아 주님의 구속받은 자라고 자기도 말하고 다른 사람들도 말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자타가 알지만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가 되어 말하는 자가 거짓 선지자이다. 속에는 우리의 구원을 삼키는 옛사람으로 되어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사장, 선지자, 왕의 직분을 다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중생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성령이 중생된 영으로 더불어 자기 안에 심신을 다스리는 주인이 되지 못하고, 악령이 자기의 주인이 되고 악성과 악습대로 움직이는 자는 거짓 선지자이다. 거짓 선지자는 겉은 새사람이고 속은 옛사람이다. 믿는 행동은 하지만 속에는 옛사람이 주관해서 자기를 위하여 전적 산다. 자기에게 유익하려는 목적 달성하기 위해서 행함으로 안 믿을 때의 옛 사람보다도 더 고급 옛 사람이다. 아주 지능적인 옛 사람이다. 양의 옷을 입고 오나 양을 노략질하는 이리가 되어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한다.
16-20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거짓 선지자들을 알 수 없으면 그의 열매를 보아서 알 수 있다. 그 나무에 그 열매를 맺게 된다. 포도나무에 포도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가지이므로 가지에 예수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요 15:1-8). 예수님의 열매는 성령과 진리의 열매이다. 또 무화과나무는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맺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화과나무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면 주님의 나라가 건설된다. 그러나 가시나무와 엉겅퀴에는 무슨 열매가 맺는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거하는 땅에 가시와 엉겅퀴가 있었다. 가시와 엉겅퀴의 열매는 죄와 마귀와 사망의 열매를 맺는 것뿐이었다. 가시나무에 포도를 맺을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 아름다운 나무가 무엇이며, 아름다운 열매가 무엇인가? 땅위에 아름다운 것은 하나도 없다.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보시고 ‘보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셨다. 그 후에 인간이 범죄하므로 세상은 죄와 마귀와 사망 아래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은 하나도 없다.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아름답다’는 말은 ‘흠이 없고 좋다’는 말이다. 아름다운 나무는 하나님 한 분뿐이시고, 아름다운 열매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이루어진 것이 아름다운 열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몸이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깨끗하여 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그의 형상을 우리가 덧입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주님은 부르셨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열매는 심판이 와도 정죄 못하고, 마귀가 와도 송사 못하고, 사망이 와도 죽일 수 없으며, 세월이 어떻게 가도 그를 썩힐 수 없는 영원성, 완전성, 불변성의 것들을 가리켜서 아름다운 열매라 한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는 그에게 이루어진 것이 순전히 하나님과 진리로 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인간 세력이나 인간 지식이나 어떤 그 과학이나 어떤 문화나 어떤 물질이나 어떤 권세나 그런 것으로 되었는지 그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쁜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된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그 나무는 영원한 불못 곧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된다. 거짓 선지자의 행위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 7:21-23
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그것이 구원이다. 많은 진리가 있지만 자기 현실에서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이 자기에게 알려주는 것은 양심의 귀로만 듣지 다른 귀로서는 듣지 못한다. 신구약 성경 말씀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지켜야 할 장소가 있고, 때가 있고, 또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키라 할 때에 지키는 것이 그에게 대한 주님의 뜻이다. 이대로 행한 것이 구원이 된다. 그런데 자기 뜻대로 전도하고, 또 이적을 행하고, 또 귀신 쫓아내고 하는 것이 구원이 된 줄로 가르친 것이 거짓 선지자이다.
또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되는 것도 아니다. 성경 읽는 것은 구원을 이룰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는 것도 구원이 아니다. 기도도 구원을 이룰 수 있는 모든 은혜를 하나님께 부탁해서 구하는 것이다. 전도하는 것도 구원은 아니다. ‘네가 남의 죄를 사해주지 아니하면,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천부께서도 너를 용서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를 죄악에서 구출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주님이 주기도문에 가르쳤다. 자기 현실에 하나님과 진리와 자기와가 삼합이 되어 가지고 움직인 그것이 구원이다.
우리가 이런 일을 많이 했으니까 구원을 줘야 되지 않습니까? 하니까 그때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그러면 전도한 것이 불법인가? 불법이 아니다. 선지자 노릇한 것도 불법이 아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 불법인가? 불법 아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능한 일 한 것이 불법인가? 불법 아니다.
불법이 아니면 무엇이 불법인가? 각각 자기의 현실에서 자기의 인격과 양심을 기울이면 성령님께서 감동하셔서 ‘이렇게 해라’ 하는 그 법대로 행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의 법이다. 그것이 영생하는 법이다. 구원에 대해서 ‘불법이다’ 하는 것은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아니한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선지자 노릇하고, 능한 일하고, 주여 주여 부르고 누가 봐도 예수 믿는 사람으로 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구원이 없다 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다 기본구원을 얻어 천국의 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 공로로 간다. 천국의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영생하는 성화의 구원을 얻고 못 얻는 것을 말씀한다. 불법을 행하면 성화가 건설되지 못한다.
주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행하는 자와 행치 않는 자가 다르다. 자기의 현실에서 성령의 감화 감동이 와서 ‘이렇게 해라’ 기름부음이 옳고 바르고 참되게 가르친 그대로 행한 것만이 구원이 된다(요일 2:27). 그것이 아니고 껍데기 외식만 갖춰서 하는 이것이 구원인 줄 아는 사람과 또 그것이 구원인줄 알고 그대로 구원을 이룬 사람과 시험하는 시험이 올 때에 들어나게 된다. 불법은 성령이 가르쳐주시는 영감과 진리가 아니면 다 불법이다. 하나님의 법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없으면 기본구원은 얻어서 천국을 가도 성화의 구원을 건설하지 못함으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시는 것입니다. 성화구원을 건설한 것만 가지고 부활하고 영생한다.
천국 건설 7:24-27
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1-23절을 결론하여 “누구든지”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택함과 대속과 중생으로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하는 말씀이다. 믿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는가? 각각 자기의 현실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성경의 진리대로 행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므로 심령을 깨끗하게 하면 성령이 감동하시는 진리대로 믿고 행할 때 주님이 동행하여 주신다. 성도가 영감과 진리대로 믿고 순종하면 주님이 건설하여 주시는 신령한 전이 지어진다.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시다(고전 3: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기본구원을 믿는 믿음 위에 성화구원이 건설되는 것은 영원하고 완전하다.
우리의 성화구원은 세상의 시험과 시련을 통과해서 승리한 것이 구원된다. 어떤 시험이 오느냐?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건설한 것이 무너지지 아니해야 성화구원이 건설된다. 그것은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라고 말씀한다. 주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그 집을 모래 위에 건설한 것과 같아서 무너지는 것은 성화구원이 건설되지 아니함을 말씀하는 것이다.
‘비가 온다’는 것은 세상에 모든 좋은 것을 다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창수가 난다’ 말은 비가 오는 것이 심해서 큰 화가 되는 것을 말한다. 반드시 좋고 난 다음에 뒤에는 나쁜 것이 온다. 사람의 멸망이 구원에서 나온다. 실패는 성공에서 나온다. 또 ‘바람이 분다’ 그 말은 모든 운동들이다. 사망운동, 저주운동, 사상운동, 새마을 운동, 이 모든 운동들이다. 비 오고, 창수 나고, 바람 부는 것을 세 가지로 말한 것은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우리의 구원을 해할 수 있는 그 전부를 총칭해서 말한다.
세상에 무엇이 있는가? 세상에 인간이 있다. 물질이 있다. 마귀가 있다. 사망이 있다. 크게 말하면 이 네 가지가 있다. 이 네 가지가 넘어뜨려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 영생하는 구원이다. 무너지지 않는 것은 주초가 반석이냐 아니면 모래이냐? 둘 중에 하나이다. 여기 반석은 조물주 완전자 영원자 불변자 하나님을 말씀한다. 그분이 현실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실 때에 그 뜻에 따라서 그대로 행한 것만 건설구원이 된다. 하나님의 뜻이 근거되지 못하면 어떤 것이라도 다 모래 위에 주초를 삼은 어리석은 자라는 말씀이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지 못하므로 삼가라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종들이지만 이 구원에 대해서 잘못 가르치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이다. 아무리 선지자 노릇하고, 능한 일하고, 귀신 쫓아내지만, 그것이 구원인줄 아는 그것이 자기 구원도 이루지 못 할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이것이 구원이다’ 했기 때문에 구원에 대해서는 잘못 가르치는 거짓선지자이다. 거짓 선지자는 껍데기는 양이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이다.
껍데기는 예수 믿는 사람이 주의 것 되고, 주님으로 움직이고, 주님을 부르고, 주님을 찬양하고 하지만 속에는 자기가 중심이 돼서 자율로, 육체의 소욕으로 살기 때문에 속에는 바꿔지지 않는다. 속에는 옛사람이 주인공 되어있고, 하나님과 진리로 중생된 영이 주인 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 하나님과 진리로 중생된 영이 심신의 주인이 되도록 자기를 거룩하고 진실하게 하는 것이 먼저 중요하다.
그래도 거짓 선지자를 모르느냐? 그러면 그 열매를 그 나무를 보면 알 수 있다. 영원하고 완전한 행위의 결과를 맺는 것이 우리의 건설구원이다. 완전한 구원은 완전한 나무에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으로 인하여서만 썩지 않고 쇠해지지 않고 더럽지 않고 병들지 아니하고 완전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 맺어진다.
주여! 주여! 부르며 천국의 구원을 얻은 자라도 불법을 행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이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지 못하면 함께 불법을 행하고 건설구원을 이루지 못한다. 하나님의 감동하시는 영감과 진리를 따라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행위는 반석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무너지지 않는다. 오늘 당면한 현실에서 내가 지켜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성도이다. 이렇게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고 삼가야 한다. 참 선지자와 함께 하는 자는 미련한 자가 아니다.
우리가 성화구원을 건설했으면 세상의 어떤 시험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의 구원을 시험하여 보면 안다. 우리는 시험해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자신을 확실히 확정해야 한다.
어떻게 시험하는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이 있다. 우리의 희로애락, 지정의, 언행심사 이것이 현실 현실마다 부딪힐 때에 반석 위에 지은 것으로 요동이 되지 않는가? 아니면 모래 위에 지은 것으로 요동이 되는가? 요동되지 않으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요동이 되면 그리스도의 삶이 아니고 스스로 사는 것이다.
반석 위에 지은 건설은 하나님과 진리로 인한 신앙 행위이다. 또 모래 위에 지은 건설은 피조물로 인한 행위이다. 피조물로 인한 것은 전부 무너지는 것이다. 비, 창수, 바람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권세 영광 물질 학문 사상으로써 최종은 무슨 권세가 있는가? 죽고 망하는 권세뿐이다. 마귀 권세이며 죄악의 권세이고 사망의 권세이다. 죄악으로 더 빛나고, 마귀로 더 승리하고, 죽음이 와도 더 승리로 나타나고 세상 좋은 것, 두려운 것, 흉한 것, 고통스러운 것이 와도 흔들어 넘어뜨릴 수 없는 것은 반석 위에 건설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진리를 바로 깨닫고 믿어야 한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지 못하면 모래 위에 건설하고도 무너지지 않는 줄 알기 때문에 일생을 속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말씀을 한다.
예수님 설교에 대한 제자들의 응답 7:28, 29
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이 끝날 때 마태는 무리들이 그의 교훈에 대한 반응을 말씀한다. 무리들은 그의 가르치는 교훈에 있어서 그 이전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교훈에 놀라고 권위있는 말씀으로 깨달았다. 그 놀란 것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하는 말씀이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심판주이심을 나타낸 것은 보통 사람들과 동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리들은 당시 율법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에게 배웠다. 이들과 비교할 때 갈릴리 목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은 자신이 계시의 주체가 되어 진리를 선포하므로 권세있는 자같이 생명과 능력이 있는 말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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