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4장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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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3-12-27 16:45 조회50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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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울의 고민
요절: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7절)
3장과 4장은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고, 복음의 우월성을 교리적으로 밝히고 있다. 4장에서 1-7절은 유업을 받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의 지도를 받지만 장성하면 받지 아니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까지 율법이 안내하는 것을 말씀하고, 8-1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으면서 몽학선생의 지도를 받으려 하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어리석음을 말씀한다. 또 12-20절은 율법에 의존하려는 갈라디아 성들에 대한 바울의 고민을 말씀하고, 21-31절은 율법과 복음의 결과적 차이를 종의 자녀와 자유자의 자녀로 명백하게 말씀한다.
후견인과 청지기로서의 율법 4:1-7
1-3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바울 서신에서 자주 ‘내가 또 말하노니’라고 말씀한다(롬 15:8; 고전 7:29; 갈 5:16). 그 의미는 새로운 구원 도리나 언급된 주제를 이어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것은 갈 3:29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받을 유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또 말씀한다.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자는 아버지의 모든 것에 대한 주인이다. 주인이 주인 행위를 하기 전에 그 인격과 실력을 어릴 때부터 주인의 종과 같은 입장에서 배운다. 아들은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의 지도를 청지기와 함께 배우고 연습하며 훈련을 받는다. 아버지의 정한 때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율법을 다 이루시기까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하는 안내자이다. 후견인은 당시 로마에서 14세나 16세까지 몽학선생의 지도를 받은 자가 25세 성년이 되기까지 후견인의 지도와 훈련을 받게 된다. 이는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 직무를 감당하도록 지도받고 훈련받는 것이다(눅 12:42; 16:1). 복음 전도자를 하나님이 청지기로 말씀한다(고전 4:1, 2).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대속을 완성하시기까지 율법이 몽학선생 노릇을 한 것처럼 후견인과 청지기 노릇을 하는 것으로 비유해서 말씀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도리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므로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을 초등학문(갈 4:9; 골 2:8, 20) 아래에 있다고 말씀한다. 율법 아래에 있어서는 구원의 도리를 깨달아 가지는 기초단계이고, 그리스도가 오셔서 사활로 대속을 완성하시고 성령과 진리로 인도할 때는 비로소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생명 길로 인도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 전에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은 우리가 죄의 종이 되어 산 것을 깨달아 알게 하는 것(롬 3:20)이지 죄의 종이 된 데서 해방과 자유로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시고 사활로 대속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증거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의 영감과 진리를 따라 순종하는 행동을 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문서계시 속에 영감계시를 믿고 있다. 성경과 성령의 인도는 진리와 영감의 인도이다. 성도가 자기의 세상 현실에서 구원의 도를 깨닫고 믿음으로 성령의 감동하시는 영감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 안에서 내주하시고 인도하시며 책임지시며 은혜와 복으로 역사하여 주신다. 성경의 진리는 성도를 영감에 이르게 하고, 성령의 감동하시는 영감은 성도를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며, 성도가 그 계명을 지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영감과 진리로 인도해서 생명과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하신다. 이것이 성도가 영생하는 길이다.
4-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 택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예정하신 때를 따라서 그의 아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여자에게 나게 하신 예언(창 3:15)대로 오셨다.
또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 곧 죄인을 구원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신인양성일위로 오시고 율법 아래 나신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으로 나서 택하신 모든 백성들의 율법을 범한 모든 죄책을 담당하여 대형으로 사죄를 주셨다. 또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와 명령에 대신하여 순종하심으로 대행의 칭의를 완성해주셨다. 또 그는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하시려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만물 사이에 모든 불목을 화목하게 하는 제물이 되어 죽으셨다. 또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므로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는 모든 사람들이 영생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모든 죄인을 의롭게 하시고 하나님 아들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구속하셨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이제 율법 아래에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의의 종이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영생하는 구원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아들의 영, 양자의 영(롬 8:15), 하나님의 영(롬 8:14), 그리스도의 영(빌 1:19),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롬 8:14). 성령은 우리 중생된 영과 함께 우리 마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증거하여 믿게 하고(롬 8:16), 또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요 1:12). 그래서 믿는 우리는 이미 영생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성령도 이미 우리 안에 와서 항상 계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 새로 성령을 받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후로는 믿는 우리가 죄와 마귀와 사망의 종이 된데서 해방과 자유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자유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인격과 실력을 길러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자라가야 한다. 이것은 오직 믿음과 인내로 성화되고 성장하는 것이다.
종으로 돌아가려는 자의 어리석음 4:8-11
8-11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율법의 몽학선생(갈 3:23-29), 후견인과 청지기(갈 4:1-7) 비유로 율법의 권한과 기능의 제한성을 밝히고 증거함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성도들이 율법에 종이 되어있는 어리석음을 8-11절에서 말씀한다.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른 교리와 신조를 가지지 못하면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도를 버리고 여전히 율법이 정죄하는 죄 아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모시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다. 그때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지 못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알지 못한 것이다.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다른 서신에서 그 우상을 신이라 하거나(고전 8:5) 귀신(고전 10:20)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러한 우상을 섬기므로 우상에게 종노릇을 하는 이방인들이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어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것을 유업으로 받아 영생하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만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죄와 마귀와 사망의 종이 된 것을 바울은 복음을 전한 후에 고민하게 되었다. 날을 지키는 것은 일상의 날이 아니고 안식일이나 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눅 18:12; 롬 14:5, 6). 달을 지키는 것은 매달 첫 날을 월삭으로 지킨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나팔절, 부림절과 같은 절기를 유대인들은 거의 한 달에 한 번은 절기를 지켰다. 해는 안식년이나 희년을 말씀한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와 같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보다 율법의 규례대로 지켜 행하는 것을 보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수고가 헛되고 그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율법은 사활로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사시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영광의 구원에 이르게 된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자는 아무도 없다. 완전한 율법을 무지하고 무능한 사람이 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자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게 하고, 그리스도는 성도가 성령과 진리를 따라 믿음으로 행하게 한다.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에게 성경은 율법이면서 복음이다. 성도는 성경이 증거하는 진리와 영감대로 믿어서 자기 신앙양심을 일깨우면 성령이 영감과 진리로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고, 그리스도는 성도 안에 내주하시고 믿고 순종하는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로 연합하여 하나의 교회가 건설되게 하여 주신다(엡 2:22; 4:15. 16).
갈라디아 교회의 사랑과 바울의 고민 4:12-20
지금까지 갈라디아 교회의 영적 상태와 문제의 원인이 되는 율법주의자에 대한 책망을 말씀했으나 이제부터는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사랑(12-15절)과 그들의 현재 상태에 대한 복음 전도자의 고민으로 바른 믿음으로 돌아올 것을 사랑으로 권고한다(16-20절).
1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므로 형제들이다. 동등한 상속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들을 이렇게 바울은 가깝게 사랑과 긍휼로 상대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말씀한 그 내용이 무엇인가? 복음 전하는 자의 태도가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상대의 입장에 서야 상대도 나와 같이 될 수 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현재 율법 아래에 있는 것과 같이 나도 과거에 그러했지만 이제는 내가 복음을 전도하는 자가 된 것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갈라디아 성도들을 사랑해서 권면하는 것처럼 그들도 사랑하므로 이 권면을 받아들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유대인이면서 복음을 받아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는 것처럼 갈라디아 성도들도 율법 아래에 있지 말고 복음을 받아 믿음으로 은혜 아래에 있어서 자유하라고 권면하는 말씀인가? 무엇을 말씀하는가? 그것은 문맥으로 보아 마지막의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따라 믿은 성도들이 율법주의로 돌아간 것은 바울에게 실망이지만 바울에게 해를 주지 않았다고 말씀한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원주민이 아니고 율법주의자들인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이다(행 13:50; 14:19). 바울은 육체의 약함을 안질이나(행 9:9; 갈 4:15), 간질로(갈 4:14) 육체의 병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바울이 처음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견해는 바울의 1차 전도에서 밤빌리아 버가에서 말라리아에 걸렸으며, 그 합병증으로 오는 두통이나 간질로 보기도 한다. 바울은 육체의 약함이 있음에도 복음을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을 멀리하지 않고 바울이 복음 전하는 것을 기뻐하므로 받아들였다.
바울의 육신이 연약함으로 갈라디아 지방 성도들에게 시험거리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성도들은 바울을 업신여기지도 아니했고, 버리지도 않았고, 도리어 바울을 그들이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믿고 영접했다. 사도 바울에게 육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울을 믿고 영접한 것은 그의 인물이 아니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 역사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들의 감사와 기쁨과 충성을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하는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영접할 때의 처음 감사와 기쁨과 충성을 떠나서 이제 율법적인 생활을 하므로 그때 감사와 기쁨과 충성은 사라졌다. 그들이 복을 받아 누리는 그 방편은 율법 아래에 있지 말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 감사와 기쁨과 충성을 회복하는 것이 너희 복이라는 말씀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 성도들에게 다시 증거하는 것은 이것을 회복했을 때에 너희들에 소중한 눈이라도 빼어 내게 주었을 것이다고 말씀한다. 육체의 연약함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 말씀을 볼 때 ‘안질’로 짐작하게 한다. 눈을 회복하도록 그들이 눈이라도 빼어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기쁨을 주려고 했을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사랑하고 위로하며 복음을 믿음으로 충성하도록 격려한다.
16-20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바울로 하여금 전해 듣고 믿음으로 기뻐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갈라디아 지방 성도들이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을 받아 율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바울에게 심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은 갈라디아 지방 성도들에게 참된 복음으로 살지 못하게 하므로 바울은 성도들에게 원수가 되도록 한 형편이 되었다.
율법은 이용물이 아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대로 살게 하는 것이다.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를 자는 아무도 없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과 진리의 은혜를 깨닫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는 심히 안타까워하는 심정이다. 저희는 율법주의자들이다. 그들이 갈라디아 지방 성도들에게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닌 것은 복음으로 살지 못하도록 미혹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성도들이 이와 같은 미혹에 빠지면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없고, 불의한 자가 되므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은 이간을 붙여 갈라디아 성도들을 율법주의자들과 함께 자신이 열심 내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믿음으로 살지 못하게 한다고 바울은 경고한다. 이렇게 이간을 붙이는 행위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오늘 믿는 우리는 율법으로 인하여 율법에 머무르지 않고, 참된 복음을 받아 영감과 진리를 따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생명과 평안을 누리도록 힘써야 한다.
17절에서 “좋은 뜻이 아니요” 말씀하면서 나쁜 의도에서 열심 내는 것의 잘못을 지적하고, 18절에서 좋은 의도에서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을 내고 사모하게 하는 것은 갈라디아 지방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믿음으로 열심을 내고 사모하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을 권면하는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과 함께 바울이 거기 머물러 기쁨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뿐만 아니라 그 이후 언제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믿음으로 열심 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바울도 그런 열심을 계속하고 있고 갈라디아 성도들도 그러하기를 권면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믿음으로 낳은 참 아들을 사랑하고 권면하는 것으로 “나의 자녀들아”라고 말씀하고, 딤전 2:1에서도 믿음 안에서 디모데를 두고 참 아들이라고 말씀했다. 사도 요한도 요일 2:1, 12, 28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사랑하고 권면하여 낳을 뿐만 아니라 양육하는 책임도 지고 말씀한다(고전 4:15-17). 사도 바울이 처음 갈라디아 지방에서 믿음으로 성도들을 출산할 때 해산하는 수고를 한 것은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열심과 사랑과 수고로 감당한 것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지금도 그러한 수고를 각오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에게까지 자라가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은 잊어버리고 율법적인 생활로 변하여 가는 것을 염려하고 고민하는 심정을 나타낸다. 이제라도 나와 함께 있어 복음을 따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로 살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항상 율법 아래에 있을까 염려하고 고민하는 바울의 신정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도 우리들이 계명을 지켜도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여전히 율법 아래에 있게 된다.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믿음으로 성령의 감동하시는 영감과 진리를 따라 믿는 자라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닮아갈 수 있다.
종의 자녀와 자유자의 자녀 4:21-31
21-23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3장과 4장에서 율법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를 밝히면서 마지막으로 4:21-31에서 구약을 인용(창 16, 21)하므로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말씀한다. 진리를 선포하는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내게 말하라” 이렇게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들의 용어로 명령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있으면 지적하라는 것이다.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은 율법주의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다. 율법에서 어떻게 듣고 배워서 알고 있느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하갈에서 난 두 자녀의 신분과 행위로 말씀한다. 계집종 하갈이 자유하는 사라에게 속해 있는 것과 같이 율법이 복음에 종속되어 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한 것 같이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으로 복음을 핍박한다. 그러나 결국 종의 아들은 유업을 받지 못하고 내쫓기는 것과 같이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계집종 하갈에게서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은 내쫓겼고, 자유하는 사라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난 이삭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첫째 아담의 자손으로 육체를 따라 출생한 자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이다.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서 믿는 성도들은 영생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들은 죄와 마귀와 사망에서 해방을 받아 영원히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이 자유를 어떻게 누리는가? 하나님의 율법을 진리로 깨달아 지은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양심 자유는 진리로 자유하고 죄에서 자유한다. 양심으로 자유하지 못하면 저는 율법 아래에 있어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가 되지 못한다. 이것이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일 단계 자유이다. 진리로 양심 자유하는 자는 반드시 성령의 보증과 인도를 받는 것이 이 단계 자유이다. 성령이 옳다 보증하고 진리와 영감으로 인도하는 것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신앙자유이다. 저는 마귀에게 종이 되지 않고 자유하는 자이다. 성령으로 신앙자유하지 못하면 마귀에게 종이 된다. 성령으로 신앙자유하면 저를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여 주신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저 안에 내주하시고 저를 책임지고 인도하여 주신다. 그리스도를 따라 영감과 진리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는 교회 자유하는 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자유하는 자는 사망에서 자유하고 영생하는 새 생명 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이 삼 단계 신앙이다. 이러한 단계로 오늘 현실에서 죄와 마귀와 사망에서 해방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자이다.
24-26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앞에서 말씀한 사라와 하갈은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비유로 말씀했다. 사라와 하갈을 두 언약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 두 언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갈 3:16-18)과 시내산에서 모세와 맺은 약속(갈 3:19)이다. 전자는 인간에게 자유를 보장하고, 후자는 인간을 죄의 종으로 인도한다.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말씀하는 것은 율법의 한계를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은 인간의 구원을 보장하지 못하고 인간의 죄악을 깨달아 알게 하므로 인간이 죄악의 상태에서 구속함을 받는 은혜 언약을 필요로 하게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갈이 종이었던 것과 같이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율법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 모세로 주신 율법이 선포된 곳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이 아니고 시내산이다. 시내산에서 선포된 율법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의 성취가 아니다(창 13:17). 시내산을 아라비아로 말씀하는 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있어서 포괄하는 의미로 말씀한다. 율법이 선포된 시내산이 약속의 땅과 멀리 떨어져있는 것으로 비유되는 것은 계집종 하갈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율법의 한계성을 말씀하는 것이다. 지금 있는 예루살렘도 율법 아래에 중심이 되어있는 것이 시내산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율법주의자들이나 하갈이나 다 같이 율법의 종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땅에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대조된다. 지금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비유되고, 하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율법의 종이 된 데서 벗어나 자유하는 사람(히 11:16; 12:22)으로 비유되므로 새 예루살렘(계21:2)을 두고 말씀한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거듭나서 믿는 자유인으로 비유되고 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말씀하는 것은 율법에 매이지 않고 율법에서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약속된 구원을 가진 자라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이다. 하갈은 종의 어머니이고, 사라는 자유하는 자의 어머니이다. 오늘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으면 죄와 마귀와 사망의 종이 된 자녀를 생산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과 진리로 자유하는 자가 되면 자유하는 자를 생산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로 연합된 교회는 믿음의 자녀를 생산하고 자유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디도가 바울의 참 아들이 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도록 양육해야 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자기의 현실에서 성경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깨달아 그 뜻대로 살지 못한 죄를 회개하므로 심령이 깨끗하게 되면, 성령이 그에게 감동하셔서 깨달은 진리를 보증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내주하시고 그 영감과 진리대로 믿고 순종하게 하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여 주신다. 성도의 신앙은 원동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피동이다. 이것이 사라와 같이 약속이 성취되는 구원을 얻어 가지는 것이다. 주님의 교회는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을 생산하는 어머니이다.
27-29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시는 말씀은 사 54:1을 인용하고 있다. 이 말씀은 바벨론에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하므로 영광스러운 구원에 이를 것을 예언하여 주시는 말씀이고,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 주시는 말씀이다. 이는 마귀의 세력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해방과 자유를 받아 영원한 구원에 이를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 구원은 하갈과 사라로 비유된 것과 같이 율법에 매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 복음을 믿음으로 누리는 것을 말씀한다. 본문에서 “잉태치 못한 자”, “구로치 못한 자”, “홀로 사는 자”는 90세가 되도록 아이를 가지지 못한 사라를 두고 말씀하는 것이다(창 17:17). 또 “남편 있는 자”는 하갈을 두고 말씀한다. 사라의 자녀 이삭으로 나는 자녀가 하갈의 자녀 이스마엘로 나는 자녀보다 많은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영적 복을 더 많이 소유하게 되는 것을 말씀한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아 너희들도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육체를 따라 난 자이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따라 태어난 자이다. 그래서 먼저 태어난 이스마엘은 내쫓기고, 이삭이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은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 배경은 자유하는 어머니의 신분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약속의 유업을 받지 못하지만 복음을 받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하신 구원을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가 된 것이다. 육체를 따라 난 자는 이스마엘이고, 성령을 따라 난 약속의 자녀는 이삭이다. 젖을 떼고 자라가는 이삭에게 이스마엘이 조롱했다(창 21:8, 9). 그 이유는 이삭이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를 자이었기 때문이다. 이삭에 대한 이스마엘의 핍박이나 율법에 속한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핍박하는 것이 같으며,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핍박하는 것이 동일하다. 이것은 사도행전 13장과 14장에 말씀하고 있다. 오늘 육체를 따라서 난 우리는 성령을 따라 거듭나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유업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 믿는 우리들은 율법 아래에 머물지 말고, 사죄 받은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성령을 따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거하도록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30-31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성경은 이스마엘의 행위에 대하여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분명하게 말씀한다(창 21:10, 12).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하는 자들의 궁극적인 최후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신실하게 이행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 복음 전파를 훼방하고 믿음의 약속을 무시하는 율법주의자들의 마지막을 비유하여 경고해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다(마 5:17, 18). 복음은 율법을 범한 죄에 대하여 대형한 복음이고, 율법의 요구와 명령에 완전히 순종한 대행의 복음이다. 대속으로 주신 복음을 성령과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온전함을 이루신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히 12:2). 하갈과 사라, 이스마엘과 이삭,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비유해서 율법과 복음의 다른 점과 동일한 점을 지금까지 설명했다. 오늘도 우리는 성경의 진리에 머물지 말고, 성령의 영감에 나아가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 성경의 교리와 신조에 머물고, 성령의 감동하시는 영감에 나아가지 못하면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여전히 율법 아래서 육체대로 행하게 된다. 문서계시 안에 영감계시를 받아서 사랑하시고 구원으로 역사하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하는 구원을 얻기까지 믿음으로 충성해야 한다.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고,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이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다. 성령과 피와 진리로 중생해서 주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소망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는 자는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요절: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7절)
3장과 4장은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고, 복음의 우월성을 교리적으로 밝히고 있다. 4장에서 1-7절은 유업을 받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의 지도를 받지만 장성하면 받지 아니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까지 율법이 안내하는 것을 말씀하고, 8-1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으면서 몽학선생의 지도를 받으려 하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어리석음을 말씀한다. 또 12-20절은 율법에 의존하려는 갈라디아 성들에 대한 바울의 고민을 말씀하고, 21-31절은 율법과 복음의 결과적 차이를 종의 자녀와 자유자의 자녀로 명백하게 말씀한다.
후견인과 청지기로서의 율법 4:1-7
1-3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바울 서신에서 자주 ‘내가 또 말하노니’라고 말씀한다(롬 15:8; 고전 7:29; 갈 5:16). 그 의미는 새로운 구원 도리나 언급된 주제를 이어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것은 갈 3:29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받을 유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또 말씀한다.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자는 아버지의 모든 것에 대한 주인이다. 주인이 주인 행위를 하기 전에 그 인격과 실력을 어릴 때부터 주인의 종과 같은 입장에서 배운다. 아들은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의 지도를 청지기와 함께 배우고 연습하며 훈련을 받는다. 아버지의 정한 때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율법을 다 이루시기까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하는 안내자이다. 후견인은 당시 로마에서 14세나 16세까지 몽학선생의 지도를 받은 자가 25세 성년이 되기까지 후견인의 지도와 훈련을 받게 된다. 이는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 직무를 감당하도록 지도받고 훈련받는 것이다(눅 12:42; 16:1). 복음 전도자를 하나님이 청지기로 말씀한다(고전 4:1, 2).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대속을 완성하시기까지 율법이 몽학선생 노릇을 한 것처럼 후견인과 청지기 노릇을 하는 것으로 비유해서 말씀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도리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므로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을 초등학문(갈 4:9; 골 2:8, 20) 아래에 있다고 말씀한다. 율법 아래에 있어서는 구원의 도리를 깨달아 가지는 기초단계이고, 그리스도가 오셔서 사활로 대속을 완성하시고 성령과 진리로 인도할 때는 비로소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생명 길로 인도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 전에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은 우리가 죄의 종이 되어 산 것을 깨달아 알게 하는 것(롬 3:20)이지 죄의 종이 된 데서 해방과 자유로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시고 사활로 대속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증거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의 영감과 진리를 따라 순종하는 행동을 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문서계시 속에 영감계시를 믿고 있다. 성경과 성령의 인도는 진리와 영감의 인도이다. 성도가 자기의 세상 현실에서 구원의 도를 깨닫고 믿음으로 성령의 감동하시는 영감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 안에서 내주하시고 인도하시며 책임지시며 은혜와 복으로 역사하여 주신다. 성경의 진리는 성도를 영감에 이르게 하고, 성령의 감동하시는 영감은 성도를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며, 성도가 그 계명을 지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영감과 진리로 인도해서 생명과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하신다. 이것이 성도가 영생하는 길이다.
4-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 택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예정하신 때를 따라서 그의 아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여자에게 나게 하신 예언(창 3:15)대로 오셨다.
또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 곧 죄인을 구원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신인양성일위로 오시고 율법 아래 나신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으로 나서 택하신 모든 백성들의 율법을 범한 모든 죄책을 담당하여 대형으로 사죄를 주셨다. 또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와 명령에 대신하여 순종하심으로 대행의 칭의를 완성해주셨다. 또 그는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하시려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만물 사이에 모든 불목을 화목하게 하는 제물이 되어 죽으셨다. 또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므로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는 모든 사람들이 영생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모든 죄인을 의롭게 하시고 하나님 아들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구속하셨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이제 율법 아래에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의의 종이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영생하는 구원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아들의 영, 양자의 영(롬 8:15), 하나님의 영(롬 8:14), 그리스도의 영(빌 1:19),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롬 8:14). 성령은 우리 중생된 영과 함께 우리 마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증거하여 믿게 하고(롬 8:16), 또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요 1:12). 그래서 믿는 우리는 이미 영생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성령도 이미 우리 안에 와서 항상 계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 새로 성령을 받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후로는 믿는 우리가 죄와 마귀와 사망의 종이 된데서 해방과 자유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자유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인격과 실력을 길러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자라가야 한다. 이것은 오직 믿음과 인내로 성화되고 성장하는 것이다.
종으로 돌아가려는 자의 어리석음 4:8-11
8-11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율법의 몽학선생(갈 3:23-29), 후견인과 청지기(갈 4:1-7) 비유로 율법의 권한과 기능의 제한성을 밝히고 증거함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성도들이 율법에 종이 되어있는 어리석음을 8-11절에서 말씀한다.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른 교리와 신조를 가지지 못하면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도를 버리고 여전히 율법이 정죄하는 죄 아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모시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다. 그때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지 못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알지 못한 것이다.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다른 서신에서 그 우상을 신이라 하거나(고전 8:5) 귀신(고전 10:20)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러한 우상을 섬기므로 우상에게 종노릇을 하는 이방인들이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어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것을 유업으로 받아 영생하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만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죄와 마귀와 사망의 종이 된 것을 바울은 복음을 전한 후에 고민하게 되었다. 날을 지키는 것은 일상의 날이 아니고 안식일이나 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눅 18:12; 롬 14:5, 6). 달을 지키는 것은 매달 첫 날을 월삭으로 지킨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나팔절, 부림절과 같은 절기를 유대인들은 거의 한 달에 한 번은 절기를 지켰다. 해는 안식년이나 희년을 말씀한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와 같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보다 율법의 규례대로 지켜 행하는 것을 보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수고가 헛되고 그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율법은 사활로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사시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영광의 구원에 이르게 된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자는 아무도 없다. 완전한 율법을 무지하고 무능한 사람이 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자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게 하고, 그리스도는 성도가 성령과 진리를 따라 믿음으로 행하게 한다.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에게 성경은 율법이면서 복음이다. 성도는 성경이 증거하는 진리와 영감대로 믿어서 자기 신앙양심을 일깨우면 성령이 영감과 진리로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고, 그리스도는 성도 안에 내주하시고 믿고 순종하는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로 연합하여 하나의 교회가 건설되게 하여 주신다(엡 2:22; 4:15. 16).
갈라디아 교회의 사랑과 바울의 고민 4:12-20
지금까지 갈라디아 교회의 영적 상태와 문제의 원인이 되는 율법주의자에 대한 책망을 말씀했으나 이제부터는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사랑(12-15절)과 그들의 현재 상태에 대한 복음 전도자의 고민으로 바른 믿음으로 돌아올 것을 사랑으로 권고한다(16-20절).
1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므로 형제들이다. 동등한 상속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들을 이렇게 바울은 가깝게 사랑과 긍휼로 상대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말씀한 그 내용이 무엇인가? 복음 전하는 자의 태도가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상대의 입장에 서야 상대도 나와 같이 될 수 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현재 율법 아래에 있는 것과 같이 나도 과거에 그러했지만 이제는 내가 복음을 전도하는 자가 된 것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갈라디아 성도들을 사랑해서 권면하는 것처럼 그들도 사랑하므로 이 권면을 받아들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유대인이면서 복음을 받아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는 것처럼 갈라디아 성도들도 율법 아래에 있지 말고 복음을 받아 믿음으로 은혜 아래에 있어서 자유하라고 권면하는 말씀인가? 무엇을 말씀하는가? 그것은 문맥으로 보아 마지막의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따라 믿은 성도들이 율법주의로 돌아간 것은 바울에게 실망이지만 바울에게 해를 주지 않았다고 말씀한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원주민이 아니고 율법주의자들인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이다(행 13:50; 14:19). 바울은 육체의 약함을 안질이나(행 9:9; 갈 4:15), 간질로(갈 4:14) 육체의 병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바울이 처음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견해는 바울의 1차 전도에서 밤빌리아 버가에서 말라리아에 걸렸으며, 그 합병증으로 오는 두통이나 간질로 보기도 한다. 바울은 육체의 약함이 있음에도 복음을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을 멀리하지 않고 바울이 복음 전하는 것을 기뻐하므로 받아들였다.
바울의 육신이 연약함으로 갈라디아 지방 성도들에게 시험거리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성도들은 바울을 업신여기지도 아니했고, 버리지도 않았고, 도리어 바울을 그들이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믿고 영접했다. 사도 바울에게 육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울을 믿고 영접한 것은 그의 인물이 아니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 역사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들의 감사와 기쁨과 충성을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하는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영접할 때의 처음 감사와 기쁨과 충성을 떠나서 이제 율법적인 생활을 하므로 그때 감사와 기쁨과 충성은 사라졌다. 그들이 복을 받아 누리는 그 방편은 율법 아래에 있지 말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 감사와 기쁨과 충성을 회복하는 것이 너희 복이라는 말씀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 성도들에게 다시 증거하는 것은 이것을 회복했을 때에 너희들에 소중한 눈이라도 빼어 내게 주었을 것이다고 말씀한다. 육체의 연약함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 말씀을 볼 때 ‘안질’로 짐작하게 한다. 눈을 회복하도록 그들이 눈이라도 빼어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기쁨을 주려고 했을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사랑하고 위로하며 복음을 믿음으로 충성하도록 격려한다.
16-20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바울로 하여금 전해 듣고 믿음으로 기뻐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갈라디아 지방 성도들이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을 받아 율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바울에게 심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은 갈라디아 지방 성도들에게 참된 복음으로 살지 못하게 하므로 바울은 성도들에게 원수가 되도록 한 형편이 되었다.
율법은 이용물이 아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대로 살게 하는 것이다.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를 자는 아무도 없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과 진리의 은혜를 깨닫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는 심히 안타까워하는 심정이다. 저희는 율법주의자들이다. 그들이 갈라디아 지방 성도들에게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닌 것은 복음으로 살지 못하도록 미혹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성도들이 이와 같은 미혹에 빠지면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없고, 불의한 자가 되므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은 이간을 붙여 갈라디아 성도들을 율법주의자들과 함께 자신이 열심 내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믿음으로 살지 못하게 한다고 바울은 경고한다. 이렇게 이간을 붙이는 행위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오늘 믿는 우리는 율법으로 인하여 율법에 머무르지 않고, 참된 복음을 받아 영감과 진리를 따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생명과 평안을 누리도록 힘써야 한다.
17절에서 “좋은 뜻이 아니요” 말씀하면서 나쁜 의도에서 열심 내는 것의 잘못을 지적하고, 18절에서 좋은 의도에서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을 내고 사모하게 하는 것은 갈라디아 지방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믿음으로 열심을 내고 사모하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을 권면하는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과 함께 바울이 거기 머물러 기쁨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뿐만 아니라 그 이후 언제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믿음으로 열심 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바울도 그런 열심을 계속하고 있고 갈라디아 성도들도 그러하기를 권면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믿음으로 낳은 참 아들을 사랑하고 권면하는 것으로 “나의 자녀들아”라고 말씀하고, 딤전 2:1에서도 믿음 안에서 디모데를 두고 참 아들이라고 말씀했다. 사도 요한도 요일 2:1, 12, 28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사랑하고 권면하여 낳을 뿐만 아니라 양육하는 책임도 지고 말씀한다(고전 4:15-17). 사도 바울이 처음 갈라디아 지방에서 믿음으로 성도들을 출산할 때 해산하는 수고를 한 것은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열심과 사랑과 수고로 감당한 것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지금도 그러한 수고를 각오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에게까지 자라가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은 잊어버리고 율법적인 생활로 변하여 가는 것을 염려하고 고민하는 심정을 나타낸다. 이제라도 나와 함께 있어 복음을 따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로 살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항상 율법 아래에 있을까 염려하고 고민하는 바울의 신정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도 우리들이 계명을 지켜도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여전히 율법 아래에 있게 된다.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믿음으로 성령의 감동하시는 영감과 진리를 따라 믿는 자라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닮아갈 수 있다.
종의 자녀와 자유자의 자녀 4:21-31
21-23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3장과 4장에서 율법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를 밝히면서 마지막으로 4:21-31에서 구약을 인용(창 16, 21)하므로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말씀한다. 진리를 선포하는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내게 말하라” 이렇게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들의 용어로 명령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있으면 지적하라는 것이다.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은 율법주의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다. 율법에서 어떻게 듣고 배워서 알고 있느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하갈에서 난 두 자녀의 신분과 행위로 말씀한다. 계집종 하갈이 자유하는 사라에게 속해 있는 것과 같이 율법이 복음에 종속되어 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한 것 같이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으로 복음을 핍박한다. 그러나 결국 종의 아들은 유업을 받지 못하고 내쫓기는 것과 같이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계집종 하갈에게서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은 내쫓겼고, 자유하는 사라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난 이삭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첫째 아담의 자손으로 육체를 따라 출생한 자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이다.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서 믿는 성도들은 영생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들은 죄와 마귀와 사망에서 해방을 받아 영원히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이 자유를 어떻게 누리는가? 하나님의 율법을 진리로 깨달아 지은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양심 자유는 진리로 자유하고 죄에서 자유한다. 양심으로 자유하지 못하면 저는 율법 아래에 있어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가 되지 못한다. 이것이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일 단계 자유이다. 진리로 양심 자유하는 자는 반드시 성령의 보증과 인도를 받는 것이 이 단계 자유이다. 성령이 옳다 보증하고 진리와 영감으로 인도하는 것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신앙자유이다. 저는 마귀에게 종이 되지 않고 자유하는 자이다. 성령으로 신앙자유하지 못하면 마귀에게 종이 된다. 성령으로 신앙자유하면 저를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여 주신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저 안에 내주하시고 저를 책임지고 인도하여 주신다. 그리스도를 따라 영감과 진리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는 교회 자유하는 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자유하는 자는 사망에서 자유하고 영생하는 새 생명 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이 삼 단계 신앙이다. 이러한 단계로 오늘 현실에서 죄와 마귀와 사망에서 해방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자이다.
24-26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앞에서 말씀한 사라와 하갈은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비유로 말씀했다. 사라와 하갈을 두 언약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 두 언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갈 3:16-18)과 시내산에서 모세와 맺은 약속(갈 3:19)이다. 전자는 인간에게 자유를 보장하고, 후자는 인간을 죄의 종으로 인도한다.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말씀하는 것은 율법의 한계를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은 인간의 구원을 보장하지 못하고 인간의 죄악을 깨달아 알게 하므로 인간이 죄악의 상태에서 구속함을 받는 은혜 언약을 필요로 하게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갈이 종이었던 것과 같이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율법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 모세로 주신 율법이 선포된 곳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이 아니고 시내산이다. 시내산에서 선포된 율법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의 성취가 아니다(창 13:17). 시내산을 아라비아로 말씀하는 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있어서 포괄하는 의미로 말씀한다. 율법이 선포된 시내산이 약속의 땅과 멀리 떨어져있는 것으로 비유되는 것은 계집종 하갈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율법의 한계성을 말씀하는 것이다. 지금 있는 예루살렘도 율법 아래에 중심이 되어있는 것이 시내산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율법주의자들이나 하갈이나 다 같이 율법의 종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땅에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대조된다. 지금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비유되고, 하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율법의 종이 된 데서 벗어나 자유하는 사람(히 11:16; 12:22)으로 비유되므로 새 예루살렘(계21:2)을 두고 말씀한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거듭나서 믿는 자유인으로 비유되고 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말씀하는 것은 율법에 매이지 않고 율법에서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약속된 구원을 가진 자라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이다. 하갈은 종의 어머니이고, 사라는 자유하는 자의 어머니이다. 오늘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으면 죄와 마귀와 사망의 종이 된 자녀를 생산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과 진리로 자유하는 자가 되면 자유하는 자를 생산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로 연합된 교회는 믿음의 자녀를 생산하고 자유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디도가 바울의 참 아들이 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도록 양육해야 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자기의 현실에서 성경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깨달아 그 뜻대로 살지 못한 죄를 회개하므로 심령이 깨끗하게 되면, 성령이 그에게 감동하셔서 깨달은 진리를 보증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내주하시고 그 영감과 진리대로 믿고 순종하게 하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여 주신다. 성도의 신앙은 원동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피동이다. 이것이 사라와 같이 약속이 성취되는 구원을 얻어 가지는 것이다. 주님의 교회는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을 생산하는 어머니이다.
27-29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시는 말씀은 사 54:1을 인용하고 있다. 이 말씀은 바벨론에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하므로 영광스러운 구원에 이를 것을 예언하여 주시는 말씀이고,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 주시는 말씀이다. 이는 마귀의 세력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해방과 자유를 받아 영원한 구원에 이를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 구원은 하갈과 사라로 비유된 것과 같이 율법에 매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 복음을 믿음으로 누리는 것을 말씀한다. 본문에서 “잉태치 못한 자”, “구로치 못한 자”, “홀로 사는 자”는 90세가 되도록 아이를 가지지 못한 사라를 두고 말씀하는 것이다(창 17:17). 또 “남편 있는 자”는 하갈을 두고 말씀한다. 사라의 자녀 이삭으로 나는 자녀가 하갈의 자녀 이스마엘로 나는 자녀보다 많은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영적 복을 더 많이 소유하게 되는 것을 말씀한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아 너희들도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육체를 따라 난 자이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따라 태어난 자이다. 그래서 먼저 태어난 이스마엘은 내쫓기고, 이삭이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은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 배경은 자유하는 어머니의 신분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약속의 유업을 받지 못하지만 복음을 받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하신 구원을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가 된 것이다. 육체를 따라 난 자는 이스마엘이고, 성령을 따라 난 약속의 자녀는 이삭이다. 젖을 떼고 자라가는 이삭에게 이스마엘이 조롱했다(창 21:8, 9). 그 이유는 이삭이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를 자이었기 때문이다. 이삭에 대한 이스마엘의 핍박이나 율법에 속한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핍박하는 것이 같으며,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핍박하는 것이 동일하다. 이것은 사도행전 13장과 14장에 말씀하고 있다. 오늘 육체를 따라서 난 우리는 성령을 따라 거듭나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유업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 믿는 우리들은 율법 아래에 머물지 말고, 사죄 받은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성령을 따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거하도록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30-31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성경은 이스마엘의 행위에 대하여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분명하게 말씀한다(창 21:10, 12).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하는 자들의 궁극적인 최후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신실하게 이행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 복음 전파를 훼방하고 믿음의 약속을 무시하는 율법주의자들의 마지막을 비유하여 경고해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다(마 5:17, 18). 복음은 율법을 범한 죄에 대하여 대형한 복음이고, 율법의 요구와 명령에 완전히 순종한 대행의 복음이다. 대속으로 주신 복음을 성령과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온전함을 이루신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히 12:2). 하갈과 사라, 이스마엘과 이삭,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비유해서 율법과 복음의 다른 점과 동일한 점을 지금까지 설명했다. 오늘도 우리는 성경의 진리에 머물지 말고, 성령의 영감에 나아가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 성경의 교리와 신조에 머물고, 성령의 감동하시는 영감에 나아가지 못하면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여전히 율법 아래서 육체대로 행하게 된다. 문서계시 안에 영감계시를 받아서 사랑하시고 구원으로 역사하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하는 구원을 얻기까지 믿음으로 충성해야 한다.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고,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이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다. 성령과 피와 진리로 중생해서 주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소망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는 자는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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