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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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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3-06-02 10:28 조회7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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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울의 사도권 인정과 베드로에게 바울의 책망과 믿음의 우월성
요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절)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도리를 말씀하는 본론의 전반부 1:11-2:21은 사도권의 정당성으로 구원의 도리를 말씀한다. 주후 49년 예루살렘 공회에 참석한 바울이 교회 지도자들과 회담하며(1-5절), 베드로는 유대인에게 그리고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된 것을 밝힘으로 바울의 사도직이 교회에 공적으로 인정이 되었다(6-10절).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서 자유롭지 못한 베드로를 책망한 과거를 말씀하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도리를 전하는 바울의 권위를 나타낸다(11-14절). 율법의 행위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말씀한다(15-21절). 3장과 4장에서도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고 복음의 우월성을 말씀한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와 회담 2:1-5
1-2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사 년 후”는 1차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갈 1:18) 14년이 지나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다.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에 대하여 1차 방문은 다메섹을 떠난 후 방문이고(행 9:26-30; 갈 1:18-20), 2차 방문은 예루살렘 기근 때이고(행 11:27-30), 3차 방문은 1차 전도 여행 후 예루살렘 총회 방문이고(행 15:1-29), 4차 방문은 2차 전도 여행 후이고(행 18:22),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5차 방문했다(행 21:17-36). 14년 후의 방문은 예루살렘 기근 때 보다 예루살렘 총회 때로 보는 것이 많은 지지를 받는다. 2장은 이방인 전도 문제와 이방인 할레 문제를 바울의 공적을 말씀하기 때문에 기근으로 구제금 전달하는 것으로 다른 사도들을 만날 이유가 없다. 바울은 사도로서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 총회에 올라가서 이방인 선교 문제를 두고 베드로와 요한과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나서 의논했다(행 15장). 바나바는 구브로 출생이며 레위인으로서 초대교회 이방인 선교에 동참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에 선교사로 파송받았고(행 11:22), 바울과 함께 1차 전도 여행을 다녀왔다(행 13:1-3). 그는 성실하고 온유하며 구제사업에도 힘썼다(행 4:36, 37). 무엇보다도 바울과 마가를 복음을 전하는 자로 육성하는 공적을 쌓았다. 디도는 디도서 수신자이다. 그는 이방인 개종자이며 바울과 함께 동역자이면서 제자로 성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바울의 부탁을 받고 고린도교회에 문제를 해결하는 공을 세웠다(고후 7:6, 13-15; 8:16). 후에 그레데교회 감독으로 목회하다가 생애를 마쳤다.
율법주의 기독자들로 인하여 이방인 개종자들도 할레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예루살렘 성도들 간에 논쟁이 있을 때 예루살렘 총회가 소집되었고, 바울은 개인적인 의사로 예루살렘에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올라간 것을 두고 “계시를 인하여”라고 말씀한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계시는 꿈이나 환상이나 예언자들로 통하여 여러 번 있었다(행 16:9; 21:11; 27:23). 바울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복음의 은혜를 보고했다. 총회에서 바울이 이방인 선교에 대한 보고를 먼저하고, 유명한 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보고했다. 유명한 자들은 베드로, 요한, 주의 형제 야고보 등의 교회 지도자들이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율법주의 기독자들의 잘못된 주장을 고치려는 강한 의지의 방편이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끊임없이 전하는 일을 “달음질”로 표현했다. 이 복음 운동이 헛되지 않도록 하려고 신앙적으로 열심을 가지고 총회에 참석했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충성한 것이다.
3-5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구원을 얻는 것은 율법 준수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밝히는 본서의 주제를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초대교회 때 율법주의자들의 구원 조건으로 율법 준수에 대한 대표적 사례가 할례 문제였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확실하게 했다. 갈라디아 지방 교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걸림돌은 율법주의자들의 거짓이었다. 갈라디아교회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헬라인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았다. 바울은 주님을 만난 후  디도와 함께 세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예루살렘 공회에 참석해서 이방인 기독자에게도 할례를 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을 사도들과 함께 해결했다. 하나님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으로 완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라야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을 확실히 밝혔다.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복음을 따라 믿는 자라야 믿는 자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해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는 누구인가? 복음을 받아 믿는 사람으로서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자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도리를 혼돈하게 하고 믿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거짓 형제라고 한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을 고린도교회에서는 ‘거짓 사도’라고 했고(고후 11:13), 갈라디아교회에서는 ‘거짓 형제’라고 했다. 가만히 들어온 것은 아무도 모르게 들어왔다는 의미로 마귀가 보낸 자라는 의미이다. 거짓 형제가 가만히 교회에 들어온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서 ‘종으로 삼고자’함이었다. 율법은 죄를 깨달아 알게 할지라도 죄에서 벗어나게는 하지는 못한다. 율법주의자들은 복음을 받아 믿음으로 영생하는 자들의 생명과 자유를 빼앗아 도리어 율법 아래에 죄의 종이 되어 살게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이기 때문에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게 한다. 복음을 받아 믿는 자는 죄와 마귀와 사망에서 해방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는 자이고,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며, 하나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소망과 믿음을 가진 천국시민이다. 이것을 믿는 자 안에서 성령과 피와 진리가 보증하고 성화로 성장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율법을 온전히 행하고 자유할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성령과 피와 진리의 역사이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히 12:2에 말씀한다. 따라서 바울과 디도와 바나바는 일시라도 복음의 진리를 무시하고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아니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을 진리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복음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이다. 그의 대속 공로는 사죄와 칭의와 화친과 영생이다. 이 복음의 진리는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은혜와 평강이 그 안에 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구원의 도로 깨닫고 믿음으로 신앙생활 해야 한다.

예루살렘 공회에서 바울의 사도권 인정 2:6-10
6-8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유명하다는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주의 형제 야고보 등 초대교회 지도자들을 말씀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하며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되어 교회를 창설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아무 복음도 배운 것이나 받은 것이 없었다. 이는 바울이 사도들을 무시하는 것 아니고,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아 사도가 된 것을 나타내므로 사도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이미 사도된 자들로 하여금 아무 영향을 받은 것이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직접 받아서 그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개교회주의 신앙사상이 여기서 비롯된다. 그리스도의 영이 중생된 영과 함께 영감과 진리로 역사함에 따라 사람에게 피동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직접 부름과 목적과 사명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단일교회이다. 하나의 교회는 성령과 피와 진리를 따라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로 연합되는 것이다.
무할례자는 이방인을, 할례자는 전통을 따라 할례를 행하는 유대인들을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동일하나 그 상대가 서로 다른 것을 나타낸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전하는 사명을 가진 것으로서 그 사명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또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한 것을 예루살렘 교회와 그 지도자들에게 보고가 되었다. 원칙은 그러하나 실제적으로는 베드로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행 15:7; 벧전 1:1), 바울도 이방 선교 지역에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다(행 13:16, 17; 19:8, 9). 그러나 바울은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사도로 부르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씀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베드로와 동등하게 사도의 사명을 받았다고 강조한다. 바울과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주님의 부름과 사명과 목적은 동일하나 다만 전도 대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바울의 사도권은 예루살렘 공회에서 확인되고 인정되었다.
9-10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으로 사도가 된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게 된 주의 형제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인정하게 되었다. 먼저 사도가 된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사도의 권위와 독립성을 인정하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했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들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믿음과 사랑의 악수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기둥같이 여기는’ 것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초대교회에 중심인물로서 교회 설립과 발전에 주역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능력과 사명을 바울이 존중하며 권위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말씀한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고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도 구제할 것을 바울에게 부탁했다. 바울은 이미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하기 전에 유대 지역의 흉년으로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연보로 구제했다(행 11:27-30). 그 이후에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있을 때 고린도와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연보를 부탁하고 시행했다(고전 16:1-3; 고후 8:1-5). 이것이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의 복음 사업과 구제 사업이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베드로에 대한 바울의 책망 2:11-14
1:11-2:10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도로서 사도권의 신적기원(1:11-24)과 예루살렘공회에서 이방인의 할레 문제를 언급하므로 율법주의의 부당성과 복음의 정당성을 증거한다. 2:11-14에서 바울은 율법적 사고로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 도리를 깨달을 수 없음을 알고 베드로에게 책망한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의 초대 교황인 베드로의 무오가 거짓됨을 증거하고 있다.
11-13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안디옥은 그때 이방인의 교회의 중심지였으며 이방 선교의 기지 역할을 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언제 방문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일은 무엇인가? 이방인과 유대인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을 바울이 베드로에게 말했고, 베드로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여 행동한 사실에 대하여 바울이 베드로에게 면책한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가 사도로서 선배이었지만 바울은 구별해야 하는 사실을 지나칠 수 없었다. 이러한 행동은 바울의 행동이 베드로 보다 어리다는 것을 벗어나서 베드로와 동등한 사도권을 나타낸다. 로마 카토릭은 베드로를 예루살렘교회의 창설자로서 초대 감독이며 초대 교황이라고 하여 교황무오설을 주장하지만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지지하지 않는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은 누구인가 분명하지 않다. 야고보가 이방인 개종자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가를 감독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왜냐하면 야고보가 율법을 초월한 복음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행 15:13-21). 다만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를 방문한 유대인들은 공식적으로 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보였다. 베드로는 이미 환상을 통하여 이방인이 더럽지 않다는 것을 보았고(행 10:9-28), 예루살렘 총회에서 할례 문제를 해결하므로 깨끗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동석해서 식사하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동석해서 베드로가 식사하는 것을 문제시 할까 하여 식사하던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고 다른 유대인들도 일어나므로 베드로의 행동이 비굴하게 되었다(요 18:25-27).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베드로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므로 남은 유대인들도 일어나고 바나바도 일어난 것이 외식하는 행동이 되었다. 남은 유대인은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퇴색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베드로 앞에서 그의 잘못된 행동을 책망한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에서 교리와 신조와 행정 문제로 중대한 문제이다. 
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바울은 베드로의 외식과 그의 유혹으로 따른 유대인들의 행동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행동은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음의 진리를 무시하고 복음을 율법 아래로 끌고 가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적인 면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베드로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함으로 복음의 진리를 분명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사정에 매이지 말고 먼저 거룩해야 진실하게 되고 화목을 주 안에서 이루어 갈 수 있다. 거룩이 없으면 진실할 수 없고 주님 밖에서 불목하게 된다. 베드로도 바울의 책망에 반동하지 않고 그것을 시인한 것은 우리가 본받을 일이다. 유대인으로서 베드로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믿음으로 이방인에게 진리대로의 행동을 나타내 보이지 않고 어떻게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복음대로 살게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알기는 복음대로 알고 행동은 율법대로 행동해서는 이방인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먼저 믿는 성도는 이제 믿는 성도들에게 복음의 진리대로 가르쳐 주어야 하고, 그 진리대로 믿고 행동하는 언행일치가 있어야 복음은 살아나고 전파될 수 있다. 먼저 믿는 자가 바른 길로 가지 못하면 뒤따라오는 자가 탈선할 수밖에 없다.

율법의 행위에 대한 믿음의 우월성 2:15-21
15-16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을 잊어버리고 율법의 행위에 매인 베드로를 책망한 과거의 경험을 먼저 말씀한(11-14절) 바울은 율법주의를 극복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으로 주신 복음 곧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 구원의 진리를 서론적으로 말씀한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이방인이었다가 개종한 자가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과 이방인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유대인의 자부심을 말하지 않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나 베드로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먼저 받아 믿는 유대인들을 ‘우리는 유대인이요’라고 말씀한다. 유대인들은 항상 이방인을 ‘죄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말씀한다. 왜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생각했는가? 그것은 무할례자로서 제사의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율법을 지켜도 온전히 지켜서 의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나 이방인이 율법을 무시해서 죄인이 되는 것이나 동일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 차이 없고, 또 의인되는 것도 차이가 없다. 선민이라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이방인이라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동일하다.
그래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율법의 행위는 모세의 율법만이 아니고 모든 신앙적 규례나 도덕적 선을 포함해서 행함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적 사고와 행동을 말한다. 이러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 따라서 신인양성일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으로 주신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행위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 복음을 믿는 것이다. 완전한 율법을 완전히 행함으로 이루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사람으로는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육체가 없는 것은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은 대형의 사죄와 대행의 칭의와 대화친의 새 생명과 대생의 영생이다. 이것을 복음에 담아 주신 것을 깨달아 알고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의롭게 된다. 의롭게 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정죄 받을 것이 없고(롬 8:1), 모두 의롭다 칭함을 얻게 된다(롬 3:22-24).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하나인데 둘로 구별된다. 그것은 이미 받은 기본구원과 현재 건설해야 하는 성화구원이다(마 7:24-27; 고전 3:10-15; 유 1:20). 기본구원은 하나님의 선택, 예정, 창조, 대속, 영의 중생, 하나님의 자녀, 천국 시민권, 생명부활, 성령과 피와 진리의 보증 등이다. 이 기본구원에 대하여 성도는 이미 받은 은혜를 깨닫고 믿어야 하고, 현실에서 기본구원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찾아 그 뜻대로 믿고 순종하면 성화가 건설된다(요 8:31, 32). 그리스도 안에서 기본구원을 믿음으로 주님의 기쁘신 뜻대로 믿고 순종하는 일에 충성하면 주님이 지극히 큰 능력으로 믿음의 행위를 온전하게 해주신다(딤후 3:17; 엡 1:19; 히 12:2). 흰옷을 입고 주님과 동행하므로 영생하는 영광의 구원이 건설된다(롬 8:30; 계 3:4, 5, 21). 그래서 기본구원도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고, 건설구원도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다. 따라서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그것이 율법주의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받은 기본구원을 믿는 믿음으로 순종할 때 성화가 건설되는 영광의 구원은 은혜주의이다.   
17-19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의롭다(롬 3:24) 칭함을 얻었다.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무시하고, 율법이 가르쳐주는 죄를 깨닫고 죄인이 되어있으면 복음을 믿지 아니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가 된다(롬 3:20).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것을 결코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즉시 사죄의 은혜 아래에 죄 없는 자가 되어야 은혜 아래에 있게 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활대속을 단번에 영원히 완성해주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있는 자는 이미 사죄 받은 죄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므로 죄 없는 자가 되어서 믿음으로 은혜 아래에 거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은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이룬 복음이다(마 5:17; 요 19:30; 롬 13:8).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범한 죄인이 되어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를 믿지 아니하므로 사죄의 은혜를 벗어버리는 것이 된다.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은 복음을 믿지 않고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다. 율법 아래에 있으면 자신이 온전히 행하지 못하므로 자신을 범법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이 정하는 그 모든 죄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이다. 이것을 깨달아 믿고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살게 된다. 이것은 전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롬 6:5). 먼저 죽지 아니하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이 예수교이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영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교는 사활의 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요 11:25-26).
20-2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심으로 대속하여 우리에게 주신 공로는 우리의 불법(不法), 불의(不義), 불목(不睦), 불신(不信) 죄(罪)를 대형(大刑)해서 주신 사죄와, 율법의 요구와 명령에 대행(代行)해서 주신 칭의(稱義)와, 대화친(代和親)의 새 생명과, 대생(代生)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소망과 믿음을 주신 것이다(벧전 1:3, 21).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死活代贖)이다. 이제 우리는 그의 대속으로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되었고, 하나님을 대하여 영원히 산자가 되었다(롬 6:5, 11).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 내가 살아 영생하는 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죄와 마귀와 사망의 종이 되어 살 수 없는 자가 되었다. 죄를 범하지 아니하려고 우리는 우리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하여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롬 12:1). 산 제물로 드려 죄와 마귀와 사망을 이기는 자는 성령과 피와 진리를 믿음으로 영생하는 생명 생활을 하는 자이다(롬 6:5).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로 연합된 교회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된 새 사람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옛 사람이 죽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영감과 피와 진리로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의 머리로 역사해 주신다. 이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사는 것이다(요 15:1-6).
육체 가운데 사는 “내가” 누구인가? 육체 가운데 사는 나는 새 사람 자기 곧 참 자기이다. 참 자기는 중생된 영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사는 자의 중생된 영(靈)은 주격이고, 심신(心身)은 그의 소유격이다.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피와 진리로 중생된 영과 함께 영원히 역사하신다(롬 8:16).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의 영과 육은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로서 교회가 된다. 육체 가운데 사는 참 자기는 심신인 육을 가지고 사는 중생된 영이다. 이때 심신인 육은 의의 병기가 된다(롬 6:13).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사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활로 대속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가 살 때에 믿는 우리 안에 역사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능력을 힘입으면 율법을 온전히 행하고도 남음이 있다. 중생된 새 사람 자기가 육신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을 벗지 않고 입고 살 수 있다. 이러한 신앙행위를 그리스도께서 내게 합당하다고 하신다(계 3:4).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그를 영원히 책임지고 보증하여 주신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행하므로 의롭게 된다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헛일이다. 아무도 율법을 행하므로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다. 그것은 죄인이 완전한 율법을 온전히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계시고 역사하시는 성령과 피와 진리를 따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산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우리의 대속이 되고 우리는 예수님의 것이 되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즐겨 순종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사는 믿음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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