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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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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10-27 04:37 조회3,1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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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강해

제목: 팔복과 새 계명                     
요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17, 18절)
5-7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보훈이다. 그것은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새 계명이다. 예수께서 구약을 도성인신과 사활대속으로 성취하시고, 지은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소망과 믿음으로 영감과 진리대로 순종하는 새 계명을 주신 것이다. 이는 구약을 계승한 신약을 중심으로 하는 구속사가 확대되고 전개되는 것이다.
5장은 1-13절에서 8복을, 14절은 세상의 소금을, 14-16절은 세상의 빛을, 17-20절은 하나님의 법을 근거한 완전한 구원을, 21-26절은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27-30절은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31, 32절은 이혼에 대한 말씀을, 33-37절은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을, 38-42절은 저항하지 말라는 말씀을, 43-48절 말씀은 형제를 사랑하는 새 계명을 말씀한다.

8복(八福) 5:1-13
5:1-7:29은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5대 설교에서 처음 설교로서 유명한 산상보훈이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두루 다니면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고 사람의 온갖 병을 고치시다가 가버나움 근처 어느 산에서 설교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법이다. 천국의 시민으로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소망과 믿음과 삶에 대한 말씀이다. 5:1-13은 그 가운데 8복을 먼저 말씀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성도들에게는 그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복이다. 세상의 물질 풍부나 생활의 안락은 외부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는 천국을 누린다.
1-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말씀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시고 많은 사람들의 병을 치유하시면서 따르는 무리를 보시고 갈릴리 어느 산에 오르시니 무리와 제자들이 나아오므로(요 7:28, 29) 교훈하신 것을 많은 사람들이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 하고, 또 많은 율례 중 정금 같은 말씀이라 해서 황금율 또는 정금율이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복을 주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보배로운 교훈으로 엄숙함과 중대함으로 주신 교훈이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말씀은 8복중에 첫째 복이다. 여기 복이 있다고 말씀한 것은 최고의 복을 말씀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피조물로서 어떤 관계나 위치나 소유를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야 살게 된다. 회사에 다니는 사원이라도 자기의 노력으로 사는 것 같이 보여도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사는 것이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하는 중요한 직책도 권위도 능력도 인기도 다 복이다. 이런 복은 땅의 복이다. 피조물과 관계되는 복이다. 
그러나 여기 복은 땅의 복이 아니고 영원하고 완전한 복으로써 최고의 복을 말씀한다. 우주와 영계는 하나님의 집이라 할 수 있고, 하나님의 기업이라 할 수도 있다. 성도를 하나님의 기업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농장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 복이 있다 할 것이다. 예수님은 참으로 복이 있다. 천상천하에 제일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복이 있다. 모든 존재가 예수님에게 혜택을 받으니 복이 있다. 예수님은 모든 존재보다 더 온전하고 구비한 지능을 가졌기 때문에 복이 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창조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구주가 되시므로 복이 있다. 이 복은 일반 복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따져보고 평가해도 참으로 영원한 가치가 있는 최고의 복이며 평가적인 복이다. 시기나 질투가 없는 복이다. 궤휼의 복도 아니고, 착취해서 가진 복도 아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숨김도 없이 다 들어나므로 층이 많은 세계이다. 자유와 평강과 공의가 있는 세계이다.
예수님은 우리 사람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가르쳤는가?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을 얻습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까? 믿음 없이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그는 율법주의자가 되어 주님과는 원수가 되고, 자기는 교만하여 남을 정죄하는 자가 될 것이다. 자기가 율법을 지켜 구원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영감을 받지 못하고 진리만을 운운하면 위험하다. 말씀을 말하면서 성령을 만나지 못하면 안 되고, 영감과 진리에 순종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을 만나게 하는 안내자이다.
그래서 믿음 없이 행함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믿는다 하면서 행함이 없어도 안 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외식하는 믿음으로서 생명이 없는 죽은 믿음이다. 믿으면 지켜 행하게 된다. 이것이 필연적이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해서 온전한 행위를 이루게 된다. 성경에 계시하여 주신 말씀을 믿고 진실함으로 신앙양심을 가지면 영감을 만나고, 그 영감과 진리대로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그 행하는 것을 온전히 이루어 주신다. 진실함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없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행함도 구원이 안 되고, 행함이 없는 믿음도 구원이 안 된다. 먼저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신 말씀을 믿으면 그대로 지켜 행하게 된다. 이것으로 우리의 구원이 된다. 믿음과 행함은 하나이다.
우리의 기본구원은 우리의 행함이 없다. 우리가 행할 것을 주님이 대신하여 대형, 대행, 대화친, 대생하심으로 하나님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가 없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며, 하나님과 화친한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영생하는 구원을 이미 얻었다. 우리는 이 구원을 믿으면 된다. 우리가 믿고 싶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활대속과 중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소망과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믿는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다. 기본구원은 성경으로 깨달아 알고 믿으면 된다. 우리의 행함이 없이 우리의 구원이 법적으로 완전히 되었다.
그러나 우리 건설구원은 믿음으로만 되는 구원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기본구원을 우리 심신이 깨달아 알고 믿음으로 살아야 실제로 우리의 심신이 변화되는 성화구원이 건설된다. 믿음으로만 안 되고 믿음과 행함으로 건설되는 우리의 성화구원은 심신의 기능이 하나님의 속성으로 변화되는 구원이다. 성화구원은 각각 믿음의 행위가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실력의 차이가 영원하다. 이 영광의 구원은 이미 받은 기본구원을 현실에서 자기가 믿는 믿음의 분량만큼 지켜 행하므로 이루어지며 그 차이가 무한하다. 믿고 행할 때에 지극히 큰 하나님의 능력이 보증해서 도우심으로 의를 이루고 영생하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은 주의 피와 성령과 진리의 능력이다. 우리의 건설구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실행할 때에 하나님이 책임지고 완성하여 주시는 영광의 구원이다. 본문에 말씀한 8복은 기본구원에 관한 말씀인가? 아니면 건설구원에 관한 말씀인가? 8복은 건설구원에 관한 말씀이다.
대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하신 이 복을 어떤 복으로 해석하는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은 천국이 저희 것이 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세상을 향하여 육체가 가난한 자는 세상의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땅의 것을 생각지 않고 위에 계시는 주님을 생각하므로 하늘의 것이 가난한 자에게는 주님이 주장하시는 천국이 저희 것이다.
성도의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상 때문에 가난하게 되면 마음이 육체가 되고, 천국으로 인하여 가난하게 되면 마음이 심령이 된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대속 공로로 천국 시민권을 이미 받아 가지고 있는 천국 백성이다. 우리의 대속을 완성하신 주님이 천상천하를 주권하고 주재하시며 전지전능하시므로 영계와 물질계를 홀로 통치하신다. 천국의 백성이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므로 살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믿고 살려고 해야 한다. 주와 그 은혜의 말씀을 믿고 살려고 하는 성도의 마음은 진실한 마음으로 주격인 중생된 영으로 살려고 하고, 중생된 영은 성령으로 살려고 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주의 나라를 어떻게 통치하는가? 주님은 성령으로 감동하시고 말씀으로 가르쳐서 우리의 중생된 영을 통치하고, 중생된 영은 성령과 진리와 하나가 되어 우리 심령을 감동하여 깨끗하게 하며, 진리를 깨달아 회개하고 믿음으로 소원하게 한다. 우리의 영과 심령은 영감과 진리대로 믿어서 몸으로 행하게 한다. 이렇게 우리의 심령이 주님 시키시는 대로 믿고 몸으로 움직이는 그 세계는 천국이다.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은 천국이 저희 것이 되어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마음의 행동이다. 육체로 가난하게 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육체대로 살아 이루는 것은 썩어진 것을 거두고, 심령이 가난하여 이루어지는 복은 최고의 복이다. 우리 심신의 기능이 영생하는 성화의 구원이 되고, 사용되는 만물은 만물을 새롭게 할 때에 다 새롭게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하신 이 복은 하나님의 택함과 대속과 중생으로 천국 시민권을 받아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믿고 순종함으로 영생하는 복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서 천국이 저희 나라가 되는 것 아니고, 이미 천국이 저희 나라가 되어있기 때문에 믿는 자의 심령이 천국에 대하여 가난하게 된다. 심령이 천국 되면 천국에 대하여 갈급하게 되고 부족함을 가지고 그것을 마련하므로 복이 되는 것이다.
천국은 어떤 나라이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가? 천국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이 나라에는 불법(不法)이 없고, 신(信)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이다. 죄와 질병과 고생과 죽음이 없는 나라이다. 이런 것이 없는 나라는 권세만으로 안 되고 하나님의 지성지공법으로 모든 것이 비판 평가될 때에 아무 흠점이 없는 순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신성과 신격대로 된 나라이기 때문에 그 나라는 사망이 없고, 질병이 없고, 고통이 없는 나라이다. 또 이 나라는 무한한 계급 차이는 있으나 그 계급으로 시기나 분쟁이 없는 나라이다. 세상은 대개 시기와 경쟁과 분쟁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나라는 존영한 위치도 있고, 아주 부끄러운 불 가운데서 구원 얻은 위치도 있다. 자기의 성화 차이는 무한하다. 이것은 자기의 믿음 차이 때문이다. 그러나 시기나 원망이나 분쟁이 없다. 자기의 행위와 다른 사람의 행위를 똑똑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각자의 신앙행위를 정평정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만을 불평할 수 없는 광명한 나라이다.
사도 요한이 복음 운동하다가 땅위에 있는 교회들에게 버림을 받아 밧모섬에 귀향 갔다. 그는 무인도에서 혼자 있으면서 하나님과 가까워졌는데 주일날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과거에도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인데, 주일날 성령의 감동으로 심령이 밝아지니까 주님을 보았다. 머리털이 희어서 눈과 같고, 주님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았다. 주님의 얼굴을 보니 눈이 부셔서 보지 못한다는 말씀은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자기의 행위가 빈약하고 허무한 것을 몰랐는데, 성령의 감화로 심령이 더 밝고 보니 부끄러워서 볼 수가 없어서 그는 기절해서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 그때 주님이 “ 두려워 말아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죽었다가 살아난 자다”라고 위로해주셨다. 
베드로도 그물로 고기를 잡고 난 다음에 그만 주님 앞에 엎드려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말한 것은 주님을 평소에 보던 주님과 달리 보여졌다. 심령이 밝아지고 보니 주님 앞에 엎드러져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주님의 영광을 가룬 것을 탄식했던 것이다.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는 사람 수입을 네 수입으로 삼으라”말씀하고 위로하여 주셨다. 베드로는 즉시 예수님을 따랐다.
바울도 “나는 괴수 죄인이다”, “나는 만삭되지 못해서 난 자라”,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자라” 그렇게 말한 것이 심령의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깨달아 알고 자기를 알아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을 닮아서 본받은 것만 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것이 너무 빈약하니까 마음에 갈급이 생겨지는 상태이다. 돈에 갈급한 사람은 밥을 먹을 만해도 자꾸 돈을 더 모으려고 애를 쓰고 필요성을 가진다. 지식에 가난성을 가지는 사람은 남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져도 병들어 죽어가도 책을 들고 배우려고 한다. 이와 같이 하늘나라가 자기 나라가 되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그 나라의 사실을 깨닫고 보면 심령에 갈급은 세상에 있지 않고 하늘나라에 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하늘나라로 가난이고, 하나님 형상에 대한 갈급이다. 또 모든 성도들에 대해서 가난이고, 하나님의 법칙에 대한 궁핍이다. 주님도 재림하여 오실 때에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씀한다.
고린도후서 5장에도, 사도 바울의 마음이 무거운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나라에 가서 벌거벗은 자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 탄식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서 죽음을 생각하고, 세상에서 천극을 생각해서 후회할 것이 없도록 오늘 우리가 마음에 탄식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심령을 가지는 것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가 자기의 나라가 되어있는 사람은 가난한 심령을 가지게 됩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보화를 만나고 진주를 만난 사람이 자기의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과 같다 했다. 참으로 천국을 발견하면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해서 하늘나라 구원을 얻는 데 다 투자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돼야 한다. 이것이 있으면 복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은 평가적으로 최고의 복이다. 이 복은 하늘나라 복을 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모든 영물과의 관계, 성도들과의 관계, 안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 모든 만물과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 심령이 가난해야 복이 있다. 나중에 가면 모든 존재들이 환영하고 동정하고 높이도록 해야 하는데 불평하고 비웃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하늘나라를 자기 것으로 삼고 있으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면 모든 존재들 앞에 자기가 복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이 심령(心靈)은 마음과 다르다. 마음은 인적요소이다. 심령은 영이 아니고 육에 속한 요소이다. 마음보다 더 깨끗한 것이 양심이고, 깨끗한 양심보다 더 깨끗한 것이 영혼이다. 영혼은 양심보다 성령과 중생된 영에 더 가깝다. 심령은 중생된 영과 가장 가까운 상태의 마음이다. 심령은 마음이나 양심이나 영혼보다 더 깨끗하고, 더 깊고, 더 높은 근원이 되는 마음이 심령이다. 그래서 마음이 심령으로 변화되면 천국에 대하여 갈급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은 성화시키고, 우리의 마음은 양심을 써서 사욕이 없도록 해서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을 가지고 평가하는 영혼이 되면 중생된 영과 성령의 빛을 받아 우리의 마음이 심령으로 변화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욕이나 정욕을 버리고 신앙양심으로 살아야 하고, 신앙 양심을 성화시켜서 영혼이 되도록 해야 하고, 우리의 영혼이 성령과 연결되는 심령이 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믿음을 지켜 행하면 차차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져 간다. 우리의 심령에 천국에 대한 갈급과 가난을 느끼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은 육체이다.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대부분 학자들은 애통하는 심령을 가진 자가 자기의 죄에 대하여 통회하는 자로 해석한다. 애통하는 자는 애통하는 심령을 가진 자이다. 범죄한 자기의 죄에 대해서 주님이 주신 사죄의 은혜를 깨달으면 눈물로 통회하는 자가 된다. 자기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해서는 우리가 예수님 대속 공로로 이미 완전한 사죄를 받았다. 주님이 대형으로 사죄하여 주신 것을 믿을 때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회개의 눈물을 강 같이 흘리며 회개하고 믿음에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사죄를 받아도 여전히 범죄하고 있다. 자기의 죄나 형제의 죄나 눈물로 회개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사죄를 주셨으므로 위로와 평안과 소망과 기쁨을 주신다(눅2:25; 14:16; 계17:17; 21:4; 애2:18;고후7:10). 죄에 대해서 눈물로 회개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자기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을 알고 주님에게 간구한다. 주님은 우리 대속을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4:7). 자기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애통할 필요가 없다. 현실에서 믿음의 온전함을 이루는 행위를 하려면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이것을 믿는 자는 주님에게 간구와 소원을 올리고 애통하는 기도를 한다. 애통해도 경외함이 없으면 안 된다. 애통하는 기도와 경외하는 기도로 평안과 기쁨을 가지게 된다. 평안은 사람의 위로뿐만 아니라 주님의 위로도 받아야 참으로 평안하게 된다. 한나는 주의 말씀대로 기도해서 사무엘을 얻었고, 베드로는 주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고기 잡힌 것을 보고 주님 앞에 죄인이 되었을 때에 “두려워말라”하시는 위로를 얻었다. 제자들이 주의 말씀을 따라서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힘쓸 때에 부활하신 주님이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위로해 주셨다. 주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데는 두려움과 고난이 있어도 인내하는 믿음을 보시고 위로하시며 능력으로 구원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데 어려움을 알고 눈물로 간구하는 자에게 위로하여 주시고 구원으로 역사하여 주시며 방해하는 자를 물리쳐주신다 (눅2:25).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천국의 백성된 성도는 온유한 마음과 행동을 가져야 한다. 온유한 자(πραεις)는 조급하거나 경솔하고 급한 성격의 악한 행위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유화(柔和)롭고 담대하고 여유있는 아름다운 덕을 가진 자이다. 온유한 자는 연약하거나 결코 무모한 자가 아니다. 세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떻게 민첩하고 지혜있다고 온유한 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믿고 형제에 대해서 사랑하고 겸손하므로 관용을 베풀고 처신을 은혜롭게 하는 약자의 도덕이 아니고 강자의 믿음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며 오래 참으셨다. 조급하거나 남을 훼방하거나 다투지 말고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며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나타내 보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마 11:29; 고전 13:14; 고후 10:1; 딛 3:2; 약 1:21; 3:13). 형제의 범죄에 대해서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며, 온유함으로 징계하되 하나님이 회개함을 주셔서 진리를 깨달아 알게 하라고 말씀한다(갈 6:1; 딤후 2:24, 25).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 시키시는 대로 순종을 배워서 온유한 자는 사랑하며, 오래 참으며, 겸손하고, 관용하며, 훼방하거나 다투지 아니하고, 형제를 구원하는 지혜와 능력을 소유하기 때문에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 있는 자가 된다(롬 8:17; 엡 1:14-22). 땅에서 받은 기업으로 아들로서 실력이 성장되고, 그것을 하늘나라로 다 옮겨서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하여지며 영원히 하나님의 기업이 되므로 하나님에게 영광과 찬송이 된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기업이고 농장이므로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된다.
아브라함은 조카와 시비가 있을 때에 온유한 아브라함은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이 되었다. 그렇지 못한 롯은 소돔들을 택하였으나 전쟁과 유황불로 멸망을 받았고 구원을 얻었으나 불 가운데서 부끄러운 구원을 얻은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마음이 온유(溫柔)해야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이 되는 복을 얻는다.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천국은 의의 나라이다. 그래서 천국의 백성된 성도들에게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말씀한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주님은 약속대로 신실히 이루신다. 우리는 약속하신 주님을 찾아 우리 심령에 모시고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그 영감과 진리대로 믿고 순종해야 주님의 나라를 이루고 주님이 책임을 지시고 완성해 주신다. 이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이라는 우리의 세상 현실에서 믿음으로 살아 의를 이루려고 주리고 목이 말라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리와 영감에 우리의 심령이 주리고 목이 말라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다. 주의 진리와 영감대로 알고 믿고 살아야 주님이 입혀주신 칭의를 벗지 않고 입으므로 주님과 동거동행 하는 의가 이루어지고 주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배부르게 된다. 세상 복을 받아 배부를 뿐만 아니라 세상 것을 가지고 영원한 하늘나라로 다 옮기는 의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하고, 만물에게 까지 충만케 하는 복의 근원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이다(엡 1:22, 23).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야고보서 2장 13절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휴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말씀한다. 우리가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말씀하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약 2:12; 1:25). 금생과 내세에 우리가 세상에 종 되지 않게 하시고 거기서 해방과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이것을 믿고 자유의 법칙을 따라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이 은혜에 감사하고 아직도 믿지 아니하는 부모와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겨서 세상과 마귀와 죄에 종 되지 아니하도록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말과 행동을 가져야 한다.
주님은 먼저 믿는 우리를 통해서 안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심 같이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 주님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심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함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할 수 있다(요15:9-12).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긍휼을 가지는 이것이 믿음이다. 그러면 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심으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한다. 우리에게 긍휼이 없으면 주님도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지 않는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자랑하게 한다.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아 금생과 영원을 누리게 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야 자체가 성화되고, 성화된 것만큼 영원무궁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세상 복을 받지 않고 영원한 복을 받는다고 할 수 없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순종해서 금생과 내세 영원토록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청결하여지는 데는 어떻게 하면 가능한가? 자기 속에 있는 온갖 더러운 죄악과 악독을 버리고 의로운 마음을 가지면 되는가? 아니면 도덕적으로 선한 마음으로 수양하면 되는가? 청결한 마음은 사람의 의지로도 안 되고, 수양으로도 안 된다. 우리의 마음이 청결하게 되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속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되고 주님의 대속은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가 주님의 성전이 되고 주님은 우리 안에 항상 계시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주님의 것이 되고, 주님의 종이 되며, 주님의 지체가 된다.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서 주님 시키시는 대로의 사람이 되고, 우리의 마음이 청결하게 된다. 주의 말씀과 기도로 우리 마음이 깨끗하여지고, 우리의 신앙양심이 살아나서 주님을 알고 주님을 찾아 만나면 주님은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신다. 주께서 역사하시는 진리와 영감에 우리가 순종하면 복이 되고 구원이 된다.
9절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주님이 도성인신하시고 사활로 대속하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영생하게 하려는 것이다(엡 2:14-16; 골 1:20). 그래서 주님의 대속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임을 믿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므로 하나님과 진리로 화목해야 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도와주고 화목하는 것이 중요할지라도 죄를 가지고는 화목할 수 없다.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없다. 또 어떤 죄라도 그 죄로 인하여 사람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고 임시뿐이지 결국은 서로 미워하고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내 죄뿐만 아니라 형제의 죄라도 주님이 사죄하여 주었기 때문에 용서하고 내 죄는 회개하고 자복해야 한다. 주님이 사죄하여 주신 죄를 고하여 회개하고 용서하므로 죄 없이 화평을 가져야 거룩함으로 주 안에서 평강이 된다(히 12:14).
또 인간에게 있는 어떤 것으로 화평한다 할지라도 성글고 주님이 주신 칭의로 화목하는 것은 영원히 든든한 화평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대속하심 같이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하여 죽고 주님의 살으심에 연합하여 살아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다(롬 6:4-5). 하나님도, 사람도, 만물들도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게 된다. 화평하므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되는 것은 하나님 형상대로의 사람으로 성화가 되고(벧후 1:4),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으며(요 1:12; 벧전 1:5),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받게 되는 것(엡 1:14)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성화가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며 하나님의 기업으로 부요하게 되는 복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죄를 멸하고 의를 건설하여 형제를 구원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된 새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하는 데에 우리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하는 것이 그 사람과 화평을 가지는 것이며 하나님과 화평을 가지는 것이 되는 것이다(막 9:50). 우리는 화평과 화평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과 진리로 하나가 된 화평(골 1:210)인지 아니면 마귀와 사람과 거짓으로 화평인지(마 10:34); 눅 12:51)를 구별해야 한다. 그리고 소금을 두고 화목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희생이 없이는 화평이 안되는 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이렇게 화목하는 데에는 죄가 없어야 하고, 의가 있어야 하고, 내게 있는 것으로 희생하는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다. 이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책임지시며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10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세상은 죄와 마귀와 사망으로 되어있는 곳이고, 천국은 의와 하나님과 영생으로 되어있는 곳이 천국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천국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마귀는 범죄하도록 미혹하고 사망으로 위협할지라도 영원한 멸망으로 역사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신 하나님의 의를 벗지 아니하고 입고 의인으로 사는 것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한다. 믿음으로 살아야 그 믿음의 행위가 의가 되고, 영생이 되며,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구원으로 복을 주신다. 인간은 스스로 율법을 지켜 행한다고 의를 이룰 만한 능력은 없다. 우리는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에 세상은 쉽게 응하지 않는다. 우리는 믿는 데에 적은 것이라도 다해야 주님이 책임져 주시고, 세상은 우리가 믿음으로 싸워 이겨야 우리에게 좋은 선물이 된다. 우리가 이기기 전에는 항상 핍박하고 대적하고 훼방하는 것이 세상이다. 이기는 자에게는 세상에 살아도 주님이 주장하시고 자기는 주님에게 순종하는 천국이 이루어지고, 만물들도 환영하고 도우며 찬송을 한다. 영원무궁은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데 다하는 것이 최선이다. 믿어도 행함이 없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역사하시는 능력이 없다. 행함으로 그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
12-13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벧전4장13-16절 참조)
위에 8 가지로 복을 주시는 주님과 주님의 약속으로 인하여 세상이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악한 말을 할 때에 거기에 피동되지 말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즉시 고치면 되므로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믿는 우리에게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 증거하는 것은 바로 주님에게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증거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염려할 것이 없는 것은 주님이 대신하여 책임져 주시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모든 악한 것은 주님에게 맡기고 우리는 인내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또 주님이 약속하시고 책임지시며 그대로 이루어 주시는 것을 믿고 기뻐 감사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악한 말을 하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원해야 하나님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와 복으로 역사해 주신다.
중요한 것은 악한 말을 할 때에게 사람에게 피동되지 아니하는 것이 첫째로 중요하고, 둘째는 인내하는 믿음으로 순종해서 자기의 죄악을 회개하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믿음이 중요하다. 그리하면 원수 갚는 것은 주님이 책임져 주시고, 주님이 기뻐 감사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하늘에서 상으로 갚아주신다.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핍박하였고, 또 인내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 상으로 갚아주셨다. 요셉, 다니엘, 엘리사, 바울 등이 그러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선지자 왕의 직분을 받았으니 이 직분을 믿음으로 잘 감당해야 한다.

세상의 소금 5:13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택함과 대속과 중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본성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의 소금이 되어 사랑하고 희생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을 말씀한다. 소금의 본질은 짠맛이 있어서 간을 내어서 세 가지 본능을 가진다. 소금의 능력은 음식을 맛있게 하고, 부패하는 것을 방부해서 가치를 보존하기도 하며, 힘이 없는 것을 힘나게도 한다. 그래서 소금의 역할은 맛이 나게 하는 조미료와 부패하지 않도록 하는 방부제 역할을 하며 힘이 나게 하는 의약제로 사용된다. 이와 같이 성도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상대할 때 자신이 사랑하므로 희생이 되어 부패를 방지하고 힘이 나게 하며 필요한 인물이 되는 가치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 소금의 짠맛은 무엇을 비유했는가? 소금은 짠맛 하나뿐이다. 성도들의 짠맛은 진리와 영감과 대속을 비유했다. 성도는 진리로 녹아져서 거짓을 물리쳐야 하고, 영감으로 녹아져서 주관과 자율과 사욕을 부인해야 하고, 대속으로 사망을 이기고, 영생하는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소금의 짠맛이다. 이것은 성도로서 자체가 속화되지 않고 성화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을 흰옷으로 입고 그의 사랑 안에서 생명과 존귀와 영광을 누리게 한다. 소금이 이러한 역할을 못하면 아무데도 쓸데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다. 성도는 자신이 형제를 위하여 사랑하고 희생하는 것이 없으면 세상에서 필요한 인물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 세상에서 무시를 당하고 멸시를 받는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사랑하고 자신의 것을 가지고 희생할 때 존귀하여지고 필요한 인물이 된다. 성도가 세상의 소금이 되면 아무 쓸데없는 것이 아니고 필요하고 소중하게 쓰임 받게 되고, 밖에 버려지지 않고 안으로 환영과 대우를 받으며, 사람들에게 밟히지 않고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세상의 소금인 줄 알고 소금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켜 순종하므로 희생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세상의 빛 5:14-16
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신 말씀은 ‘중생해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다’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첫째 아담의 범죄로 죄와 마귀와 사망이 주장하기 때문에 어두움에 있다. 하나님은 죄와 마귀와 사망을 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도덕이나 철학이나 문화나 과학으로 세상을 광명하게 밝힐 수 없다. 아무리 법리로 질서있게 사회의 윤리를 조성해도 죄를 멸할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은 밤중 같은 어두움의 세상이다.
요한복음 1:2-5에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말씀한다. 만물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골 3:4) 세상에 오셨으나 세상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먼저 온 자는 절도이며 강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아니한 모든 지식이나 도덕이나 과학이라도 세상을 밝게 하는 빛이 될 수 없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면 어두움이 없어지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은 세상의 죄와 마귀와 사망을 멸하러 오셨다. 예수님은 사활로 세상을 이기셨고, 믿는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요일 5:4). 중생된 그리스도인이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과 성령과 진리의 중생으로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아니고 달과 같이 빛을 가진 자이다. 주의 피 공로와 성령과 진리의 보증이 성도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와서 충만하고, 그것이 만물에까지 충만함으로 세상에 빛이 되어 진다. 세상의 만물에게 진리가 빛이며, 성령의 감동하시는 영감이 빛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 공로가 빛이다. 이 빛이 오면 생명이 약동하고 그 능력으로 성장하며 번성하는 광명한 세계가 펼쳐진다. 이 빛이 없으면 아무리 믿는 자라도 어두움의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종이 되고 폐기물로서 쓰레기통에 불과하게 된다.
어두움의 세상에 빛이 되는 것은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화 감동을 주는 신앙 행위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며 자기에게 구원이 되는 신앙 행위이다. 많은 사람들을 빛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보다 자기 한 사람이 빛을 발하면 많은 사람들을 빛으로 돌아오게 하고, 자기 한 사람이 빛을 가루면 많은 사람들을 죄로 멸망하게 한다.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구속하신 것은 믿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안 되면 복음이 가루어지고 우리의 구원도 건설되지 못한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은 인격적으로 주와 같이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고, 행위적으로 하는 일에 있어서 형통한 사람이 되고, 소유적으로 자연의 은총을 받아 부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지위나 권세나 물질이나 명예가 점점 더하여 가는 것이 세상의 빛이다. 이러한 빛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동행하여 주시지 않는 증거이다. 기독자로서 이러한 빛이 없을 때가 가련한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는 노력은 세 가지로 하면 된다. 첫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을 벗지 않고 입고 사는 것이다. 어떠한 현실에서라도 대속을 벗고 살도록 하는 것이 세상이다. 성령의 영감과 성경의 진리대로 믿고 순종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와 칭의와 화친과 영생을 가진 자로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노력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영광과 찬송이 되어야 한다. 둘째는 사람을 사랑하므로 사람에게 대한 계명을 믿음으로 지키는 것이다. 믿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므로 주님의 몸이 되는 교회를 이루므로 사람들에게 구원과 기쁨을 주는 것이 둘째 빛이다. 첫째 빛이 되고 둘째 빛이 되어서 셋째 빛을 나타내어야 한다. 셋째 빛부터 시작하면 결국 인본주의가 되고 만다. 셋째 빛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가 대속하여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음으로 항상 성경을 읽고 기도해야 한다. 경영은 사람이 할지라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에게 주권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기도이다. 하나님의 주권의지와 주권능력으로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사는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현실에서 사람의 뜻대로 행하면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행위를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은 현실에서 되기 때문이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든지, 저주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든지 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복을 받아서 우리가 하는 일이 형통하고 성공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행위적으로 본이 되고, 인격적으로 본이 되고, 사업적으로 복을 받아 사람들에게 본이 될 때에 세상의 빛이 된다. 중생해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믿는 우리는 그의 몸인 교회가 되고, 만물은 그 발등상이 되어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는 교회가 되면 산 위에 있는 동네와 같고 등경 위에 있는 등불과 같다.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심히 두려운 말씀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인격이나 행위나 그 모든 삶이 숨기우지 못하고 다 드러나는 것을 말씀하기 때문이다. 빛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수치로, 빛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영광으로 드러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면 저주하시는 하나님으로 반드시 나타내신다는 말씀이다. 이것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육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분명히 이렇게 하셨다(신 28장). 그러므로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 것과 같다. 오늘 믿는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 사람들에게 보이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믿는 우리의 신앙행위가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 구원과 기쁨이 되며, 하는 일에 하나님의 복을 받아 형통하고 성공이 될 때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된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 된 것과 같이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이 빛 생활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를 따라서 나오고, 영감을 따라서 나오고, 사활대속을 따라서 나온다.

하나님의 법을 근거한 완전한 구원 5:17-20
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의 믿음과 행함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도 하고,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도 합니다. 이것이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므로 행함을 강조하면 믿음이 약하여집니다. 행함을 강조하면 은혜 아래에 있는 우리들이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믿음과 행함을 야고보서 2장 14-26절에 말씀하여 줍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절) 이렇게 말씀하므로 믿음과 행함음 나눌 수 없습니다. 믿으면 필연적으로 행하게 되고, 행하는 것을 보면 그의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행함의 알맹이이고, 행함은 믿음의 껍데기입니다. 믿음은 행함의 원인이고, 행함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따라서 행함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으면 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완성하여 주시는 구원의 방편은 은혜로 주시는데, 그것을 우리가 받는 방편은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또 그 구원을 받아서 금생과 내세에 누리는 방편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과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어떻게 됩니까? 어느 것이나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인데 둘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기본 구원과 건설 구원으로 구별이 됩니다. 기본 구원은 믿음이 근거되고, 건설 구원은 행함이 근거됩니다. 중생해서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기본 구원을 꼭 같이 받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며 주의 피와 성령과 진리의 보증이 누구에게나 차이 없이 내재하여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로는 할 수 없고 하나님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완성하여 주신 것을 믿으면 누구나 기본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건설 구원은 믿는 사람이 믿는 대로 행하여야 주님이 이루어주시는 구원입니다. 우리가 세상 현실에서 믿으면 믿음의 행위로 나타나고 영광의 구원을 얻게 됩니다. 기본 구원은 주님이 행하신 것을 우리가 믿으면 얻게 되고, 건설 구원은 믿는 우리들이 믿고 순종하면 주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이루어 주시는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그 믿음이 온전하여 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니, 행함을 강조하면 율법주의가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주님이 이루어주신 의를 힘입어 그 은혜에 감사하고 믿고 순종하는 신덕(信徳)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구원을 순전히 은혜로 주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받으며, 행함으로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선포하시고 율법대로 구원하십니다.
율법은 몽학 선생이라 하여 율법은 폐기물처럼 버리고 무시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선포하시고 율법대로 구원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은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담의 자손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자존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영원 전 의지 안에서 뜻을 정하시고 그 기쁘신 뜻을 따라서 영감으로 진리를 법으로 선포하신 것이 율법이요, 계약이며,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지성 지공법을 어기면 죄가 되고, 지켜 행하면 의가 됩니다. 율법을 선포하신 공의의 하나님은 율법을 어길 수 없으며, 율법을 어긴 자기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멸하시지도 못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사람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정죄를 받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완전히 지켜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에서 화목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오시지 않고, 완전케 하시려고 오셨습니다(마5:17). 이제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가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대형으로 완전 사죄(赦罪)를 주시고, 대행으로 완전 칭의(称義)를 주신 것이 율법대로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사람이 순종할 수 없는 율법을 하나님이 완전히 대신하여 순종하심으로 주신 구원이 기본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을 믿습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이 해결되었고,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한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입니다.

기본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완성하여 주신 구원입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기본 구원을 은혜로 받았습니다. 지극히 큰 구원을 은혜로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은혜를 깨달아 감사하며 그 구원으로 기뻐하고, 각각 자기의 현실에서 믿음으로 살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8장 4-8절에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는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법은 육신대로 행하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예정하신 때를 따라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들을 주권 개별 섭리하셔서 우리의 현실을 홀로 만드시고, 에덴동산과 같은 현실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가 만들 수 없습니다. 당면한 현실을 다시 바꾸는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현실을 도피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육신대로 살아서 죄를 만들고 사망을 초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짝을 지워주신 가정을 사람이 이혼으로 결별하는 것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아브라함이 흉년으로 가나안에 머물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 회개가 없었으면 그 가정은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우리의 현실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 같아도 자기의 현실을 떠나지 않으면 목자의 품에 안겨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물도 있고, 풀도 있고, 안식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현실은 어떤 모양이라도 자기에게 가장 좋은 현실을 만들어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영광스럽고 존귀한 구원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현실에서 자기를 현실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찾아서 그 뜻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육신대로 행하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현실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자기가 지켜 순종해야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해야 할 하나님의 법입니다. 치우치는 것이 사망의 원인이 되는 죄이며, 치우치지 않고 명중하는 것이 되면 의가 되고 영생이 됩니다. 이 법을 지켜야 우리의 건설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현실에는 내가 지켜 순종해야할 하나님의 법이 없는 현실이 없습니다. 이 법을 지켜 순종하면 의가 되고 영생하며 우리 자체가 성화 됩니다. 영광의 구원이 건설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실력이 만들어지고 하나님과 만물들에게 환영과 대우와 존귀를 받아 누리는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우리의 현실에 가득 있기 때문에 에덴동산과 같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받아 누리는 것은 각각 자기의 믿음대로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고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율법을 완전히 지켜 행할 수 없는 우리인데 어떻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건설 구원도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를 따라서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그 율법을 완전히 지켜 순종하도록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피동으로 순종하고, 하나님은 능동으로 역사하여 주십니다. 평소에 우리 복음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마음으로 묵상하여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하나님을 향하여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은혜를 사모하게 되고,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 마음에 참된 진리를 가르쳐주십니다(요일 2:27).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에 나타난 하나님의 법은 신구약 성경 안에 다 있습니다. 빠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 안에 있는 내가 지킬 하나님의 율법은 누가 가르쳐줍니까?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가르쳐주십니다. 누가 받습니까? 우리 깨끗한 마음이 받습니다. 어떻게 받습니까? 믿음으로 받습니다. 내가 지켜 순종해야할 하나님의 기쁘신 뜻 곧 하나님의 법임을 깨달아 아는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지혜가 나의 지혜가 됩니다(딤후 3:15). 또 나의 주관 자율 사욕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법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졌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롬 8:16). 이제 지켜 행할 수 있는 현실을 하나님이 만들어 주실 때 행하면 건설 구원의 실상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모양으로 보이나, 믿는 우리 안에 성령이 책임을 지시고 가르쳐주시고, 믿게 하시고, 행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게 하시고, 지켜 행하게 하시는 역사를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행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협동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의 주가 되시고 우리는 주를 따라서 순종하는 지체가 되어 행하기 때문에 건설구원도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우리는 믿고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다니엘, 바울, 아브라함, 스데반, 사도 요한.....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율법을 하나님이 선포하시고 기본 구원도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이루어 주셨고, 우리 건설 구원도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이루어 주십니다. 기본 구원은 하나님이 율법을 지켜 주신 구원이 누구에게나 꼭 같고, 건설 구원도 각각 차이가 무한히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차이입니다. 육신대로 사는 것보다 믿음으로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이 많으면 그 구원이 더 영광스럽고, 영을 좇아 행하는 것보다 믿음에서 떠나 육신대로 행하는 것이 더 많으면 부끄러운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살기 때문에 잘 모르나 부활 넘어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을 때는 다 분별됩니다. 육신대로 행한 것은 둘째 사망의 해로 불타고, 성령으로 행한 것은 의가 되므로 영원히 영광스럽고 존귀합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목적하신 그 뜻이 율법으로 선포되어 죄와 의로 구별되고, 계약으로 선포되어서 약속대로 이루시고, 예언으로 선포하여 미리 알려주시고 믿게 하십니다. 복음으로 주어 영멸하지 않고 영생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는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이제 우리에게 영원히 자유하게 하는 생명의 성령 법을 주셨습니다(롬8: 2; 약1: 25).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두 가지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본구원에 관한 말씀과 건설구원에 관한 말씀이 따로 있다 하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성경에 난해절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본구원은 예수님께서 혼자 다 이루어 놓으신 구원입니다. 혼자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택한 자들에게 공으로 주십니다. 순전히 은혜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받은 기본구원의 효력은 우리의 믿음대로 건설되어 건설 구원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기본구원 받은 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건설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기본구원을 믿는 믿음의 분량만큼 그 실상의 능력을 받고, 실상의  건설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본구원은 얻은 자들에게는 구원의 차이가 없으나, 이 건설구원은 얻은 자들에게는 구원의 차이가 많습니다. 기본구원은 은혜로 주시는 것이지만, 은혜로 주시는 기본구원을 받는 데에는 인적 요소가 필요하기 때문에 인적 요소는 꼭 같지 아니함으로 차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로 주시는 기본구원을 믿음으로 받기 때문에 인적 요소인 믿음의 차이입니다. 믿음은 기본 구원의 내용을 아는 믿음과 인정하는 믿음과 그대로 실행하는 믿음입니다. 셋 가지가 합하여 믿음입니다. 아는 데도 차이가 있고, 인정하는 데도 차이가 있고, 실행하는 데도 차이가 있습니다. 기본구원의 내용을 믿으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받아 실행하니까 건설 구원이 건설됩니다. 건설구원의 차이가 부활한 자들의 영광의 차이입니다. 해의 영광도 있고, 달의 영광도 있는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릅니다. 땅에 있는 모든 형체들의 영광도 다릅니다. 부활한 자의 영광도 이와 같이 차이가 있습니다. 은혜로 받은 기본 구원은 누구나 동등하나, 믿음으로 건설한 영광의 구원은 각각 무한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행함의 각자 차이 입니다.

율법대로의 기본구원
지금은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모두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 계속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은혜니 율법이니 해서 혼돈을 일으켜 가지고 마귀만 수입보고, 성도들은 하늘나라에 가보면 건설구원은 모두 벌거벗은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에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본 구원을 완성하여 은혜로 주셨습니다. 이 구원을 주님이 만드실 때에 무엇으로 만드셨느냐? 율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구원을 주님이 율법으로 완전한 기본구원을 만드셨습니다. 율법으로 어떻게 만드셨느냐?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의 형벌을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법대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위법한 형벌을 예수님이 법대로 받았기 때문에 우리를 정죄할 법이 없어졌습니다(롬 8:1). 우리는 죄에서 완전히 해방을 당한 것이 어떻게 해서 죄에서 완전히 해방을 당했느냐? 죄에 대하여 법대로 주님이 다 우리 대신 형을 받으시므로 우리가 완전히 정죄와 형벌을 받지 않게 됐습니다. 사망의 권세는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므로 주님이 대신 사망하셨기 때문에 죄는 없어졌습니다. 죄가 없어진 것은 법으로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으로 우리 기본구원을 이루었습니다. 기본구원의 하나는 사죄인데, 이 사죄는 예수님이 법대로 형을 받아서 완전 사죄의 기본구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으로 우리 기본구원을 이뤘다 말은 예수님이 법대로 죄의 형벌을 받아서 사죄의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하나님의 법에 무죄자가 된 것입니다. 율법이 정죄하는 권세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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